햄릿이 여자로 바뀌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입력 2024-07-16 18:14
수정 2024-07-17 00:20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

1601년 발표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이런 가부장적인 대사가 많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인공도 모두 남자다. 햄릿이 그렇고,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죽인 숙부가 그렇다. 극 중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여리고 소극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국립극단의 ‘햄릿’은 원작의 설정을 과감하게 뒤집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 햄릿 왕자를 햄릿 공주로 각색했다. 햄릿의 애인 오필리어는 남자 미술가로 바뀌었다. 원작에 담겨 있던 구시대적 편견도 과감히 삭제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뒤바뀐 성별은 여성을 다루는 소재보다는 사회를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는 장치로 쓰인다.

연극의 배경은 불확실하다. 인물 간의 관계나 통치 구조는 봉건 제도의 모습이지만 라디오 방송, 의상과 말투에서는 익숙한 현대 사회가 느껴진다. 햄릿의 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생존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위태로운 국제 정세가 연상되는 설정이다. 자신의 동생에게 살해당한 선왕은 정복과 무력 외교로 살아남았지만 국민은 오랜 전쟁에 지쳐버렸다.

주변 인물 캐릭터에도 변주를 줬다. 총리 폴로니어스의 두 아들 레어티즈와 오필리어가 원작과 달리 예술가로 설정됐다.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과 동떨어진 인물들이다. 원작에서 충신으로 묘사된 폴로니어스도 한층 복합적인 인물로 그렸다. 죽음을 맞으며 “더러운 왕가놈들”이라고 외치는 등 맹목적인 충신의 탈을 벗고 욕망과 광기에 찌든 권력을 다그친다.

새로운 결말은 관객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적국의 포틴브라스 왕자가 햄릿의 나라를 지배하게 된 것. 선왕이 포틴브라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는 내용이다.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가 선왕을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더욱 크게 열어 막장 복수극의 비극과 혼돈을 더한다.

원작과 또 다른 점은 언어. 화려한 비유가 이어지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대사와 대조되는 직설적이고 단호한 대사가 두드러진다. 인물 각자의 생각과 판단을 꼼꼼하게 설명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그려지고 비판이 날카로워지는 효과가 있다.

배경, 인물, 언어를 현대 사회에 더 맞닿도록 각색해 동시대성을 강화한 작품이다. 현대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관객에게 던진다.

신랄하고 직설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아름다운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형이 아니라 물과 빛의 흐름을 활용한 연출이 돋보인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지하 감옥처럼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는 녹색과 빨간색 조명이 비친 뿌연 안개가 인물들의 피와 영혼처럼 보인다. 마치 허공에 강이 흘러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 비극과 대비돼 더 기괴하면서 아름답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문학적인 매력은 덜하지만 대신 동시대성과 비판의식이 두드러진다. 물과 조명이 어우러져 펼쳐지는 무대가 매혹적이다. 공연은 7월 2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