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에 맞서는 전쟁보다 내전이 훨씬 비열하고 잔혹한 이유는 규율과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를 앞세운 외부 전쟁은 종전과 평화를 중재하는 국제사회라도 있지만 시민들 간 적개심과 증오로 끓어오른 내전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말살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정치인이 아닌 유권자, 타인이 아닌 익숙한 이웃과 친구들 사이에 가차 없는 총질이 벌어진다. 르완다 내전, 보스니아 내전,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어김없이 양민들 간 고문과 학살이 자행된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피격 사태를 이런 끔찍한 내전과 결부 짓는 것은 다소 비약적이다. 하지만 만약 트럼프 머리를 겨냥한 총알이 귀를 관통하지 않고 그대로 명중됐더라면 미국이 내전 상태에 돌입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미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은 2021년 초 의회 의사당에 난입해 전년도 대통령선거 무효를 주장하면서 폭동을 일으킨 바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에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폭력사태를 보면서 세계 시민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위대한 애국자”라며 이들을 옹호했다. 트럼프는 피격 직후 정신이 없었을 와중에도 “싸워라(fight)”고 주먹을 휘둘렀다. 경호원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외신들은 향후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엿보게 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묘사했지만 한쪽에서 보면 영락없이 지지자들에게 전투명령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성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정치대결은 민주주의 제도의 허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대의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은 선동과 분열을 조장하는 광장의 정치인과 열성 지지자들의 폭주에 너무나 쉽게 흔들린다. 트럼프가 검찰 기소를 ‘정치 탄압’으로 받아치면 지지자들은 바로 엄호에 나서며 결집을 가속화한다. 한국에도 몇 년째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정치인들은 어느새 현대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정확하게 간파한 듯하다. 지지자들의 도덕적 역치를 낮춰 놓으면 작은 허물뿐만 아니라 큰 불의도 덮을 수 있다는 현실적 힘의 논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회든, 행정부든 권력을 장악하면 제멋대로 법을 바꾸고 충성파들을 요직에 앉히며 사법부를 농락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미국에서 내전이나 다를 바 없는 정치적 혼란상이 빚어지고 유럽에선 극우와 극좌가 동시에 활개 치는 양상이 벌어지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발전해온 인류 문명에 큰 도전이다. 먹고살 만한 나라의 자유로운 시민들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 특정 진영에 줄을 서고 돈키호테처럼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일까.
혹자들은 경제적 양극화 탓이라고는 하지만 격차가 과거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균적으로는 훨씬 더 잘산다. 분열을 획책하는 선동이 새로운 것도 아니다. 내전은 본질적으로 배타적 권력투쟁이다.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경제적 여유를 확보한 대중은 무한 생산과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기기들을 이용해 곧장 권력 핵심으로 밀고 들어간다. 정치인이 갖고 있는 권한, 영향력, 자원 배분권을 나눠달라고 요구하고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인은 기꺼이 흥정에 나선다. ‘MAGA(Make American Great Again) 팬덤’과 ‘개딸’, 최근 회자되는 ‘한딸’이 모두 그런 경우다. 이들은 국가보다는 개인과 집단, 국익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도 자신들만이 애국적이라는 확증 편향에 빠져 있다.
단순 지지가 아닌 권력 요구형 지지가 늘어날수록 국가적 내전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에 비례해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 불안이 상존하는 우리에겐 특히 위험하다. 정치 지도자들의 자성과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하지만 권력을 획득·유지하는 수레바퀴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른다. 민주주의만 밑에 깔리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관용의 정신도 퇴조한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미국민이 이민자 추방에 환호하는 현실이다. 격화하는 내전은 상대를 제압하는 데서 나아가 완전히 멸절시키려 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이 약한 한국처럼 작은 나라는 언제든 그런 지옥문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