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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유럽 스타트업의 허브로 매년 600개의 새로운 스타트업이 탄생한다. 유니콘 스타트업만 21개를 배출했고, 독일 전체에 투자된 VC 자금의 58%가 베를린에 집중돼 있다.
베를린에는 현재 약 9만 명이 스타트업에 종사하고 있다. 베를린 스타트업 종사자들은 전 세계 186개국에서 온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다. 전체 비율로 보자면 베를린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49%가 독일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도시는 다양성을 자랑한다.
분단 이후 대부분의 기업이 고립된 섬이 되어버린 베를린을 떠났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베를린’은 통일 이후 기반 산업이 없는 베를린을 ‘위안’하는 말이었다. 물론 가난했기에 청년들이, 예술가들이 살기에 적합했고, 이들이 모이는 곳에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다. 베를린시는 이 도시를 어떻게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존 산업이 없는 곳에 가장 적합한 대안은 ‘스타트업’이었다.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베를린을 가장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서 기업의 수도 늘리고, 일자리도 늘려서 점점 이 도시를 풍요롭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스타트업을 위한 다양한 재정적 지원 정책을 마련했고, 스타트업 이벤트를 만들었으며, 외국인 창업가에게도 비자 발급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실제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등 타 유럽 도시에 비해서 월등히 싼 물가, 녹지가 많고 여유로운 자연환경,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테크노 음악, 훌륭한 연구소 및 대학이 많은 베를린의 인프라는 스타트업의 도시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베를린의 평균 사무실 임대료는 1제곱미터당 19.15유로(한화 약 28,000원/㎡)다. 연봉 수준이 다른 독일 도시보다 평균 40% 낮기 때문에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을뿐더러, 총리실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정치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정책 결정권자 및 관련 기관과 가깝다는 장점도 있다.
지난 5월 말, 베를린 시청에서는 특별한 회의가 열렸다. 바로 1년에 딱 두 차례 열리는 아시아베를린(AsiaBerlin) 앰버서더와 베를린 시 정부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회의다.
아시아베를린은 베를린시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스타트업 생태계 교류를 위해 만든 이니셔티브이다. 매년 베를린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루는 창업가, 투자자, 정부, 대기업 등의 관계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아시아베를린 서밋(AsiaBerlin Summit)이 이 이니셔티브가 주관하는 가장 큰 행사이다.
이 베를린 스타트업 생태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 중 하나인 아시아베를린은 1997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베를린 아시아-태평양 주간(Asia Pacific Week Berlin, APW)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교류 위주 행사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경제 부문, 그중에서도 스타트업에 초점을 맞추어 매년 아시아베를린 서밋을 개최한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시의 미래와 혁신을 고민하는 ‘모빌리티와 창의도시(Mobility & Creative City)’라는 주제가 채택되면서, 화두가 스타트업 생태계 간의 교류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아시아베를린에는 총 34명의 앰버서더들이 있다.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각국을 대표하는 앰버서더이자,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대기업, 창업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두 생태계의 연결을 돕는다.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순전히 두 생태계가 함께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봉사’를 한다.
이번 아시아베를린 앰버서더 회의에 나는 신규 임명된 한국의 앰버서더로 참석해 아시아베를린의 활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기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 앰버서더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와 베를린 양 생태계의 스타트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단순한 친목 모임 정도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내가 가진 편견은 단숨에 깨지고 말았다. 유럽 내에서 최고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베를린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특히 외국인 창업자와 투자자, 스타트업계 종사자들을 위한 더 다양성이 존중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주제는 ‘비자’였다. 베를린시 산하 경제 진흥기관인 베를린 파트너(Berlin Partner)에서 베를린 기업 및 스타트업이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있도록 돕는 부서인 인재 (Department of Talent Service)의 팀장인 다비드 크레머(David Kremers)는 작년 하반기 아시아베를린 앰버서더들이 공식적으로 요청한 ‘훌륭한 인재 유치를 위해 베를린시가 하는 조치’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크레머는 아시아인/외국인 창업자들과 투자자들이 비자를 손쉽게 받게 할 수 있도록 베를린시가 구축하고 있는 ‘비자 원스톱 시스템’에 관해서 설명하고, 현재 비자청 직원들의 재교육을 통해 영어 능력 향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문화 관련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여권 파워가 세고 국가신뢰도가 높은 한국의 경우, 기본적인 비자 신청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베를린에서 창업 비자와 취업비자 등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은 편이다. 나의 비자와 내 지인들의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2010년부터 지금까지 수십번 베를린 비자청을 드나드는 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 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외국인 창업자의 비자 신청 프로세스를 쉽게 하기 위한 많은 지원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 등 한국과는 다른 처지의 국가 앰버서더들에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고도 골치 아픈 문제인 듯 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영국에서 공부하고, 이미 런던에서 창업 경험도 있었던 한 앰버서더는 런던에서와 달리 국적이 스리랑카라는 이유로 타국 출신의 이민자보다 더 많은 재정 증명서류를 요구받았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며, 같은 아시아 국가라도 ‘차별 받는 현실’에 대해 개선의 목소리를 높였다.
베를린시는 타 도시에서 벤치마킹을 하러 올만큼 비자 신청 시스템과 그 기준이 상대적으로 유연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처음 시작하여 여러 다양한 방면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창업자들에게 기본적인 체류 조건인 ‘비자’ 문제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다.
두 번째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은 창업자들의 ‘법인 통장 개설’에 관한 문제였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전 독일지역은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은행의 까다로은 KYC(고객환인)절차를 요구한다. KYC는 금융회사가 자신의 서비스가 자금세탁 등 불법행위에 이용되지 않도록 고객의 신원, 실제 당사자 여부 및 거래 목적 등을 확인하는 등 고객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과정을 말한다.
요즘 독일의 창업생태계에서는 이 KYC 절차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매우 높다. 특히 비독일 국적을 가진 창업자, 투자자뿐만 아니라 외국계 기업이 독일 내에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고, 독일 은행에서 법인 통장을 개설하려고 할 때, 독일 내에 회사 및 회사 경영진의 신용도가 낮기 때문에 법인 통장 개설이 거절되는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5~6년 전 한국의 모 대기업 계열사가 독일에 법인 설립을 하는데, 대기업 총수가 직접 은행에 방문해야 통장을 개설해 줄 수 있다는 은행 담당자의 답변을 받았다는 사례도 있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결국 그 계열사의 경우 실제 기업 총수의 서명이 들어간 위임장 등 필요 서류를 공증 후 외교부의 아포스티유 등을 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어렵게 법인 통장을 개설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는 비단 이제 시작하는 스타트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외국계 기업이 가진 높은 진입장벽이다. 점점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긴장감이 높아진 현 시국에서 이 장벽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다.
최근 독일의 창업자들 사이에서도 도이치은행(Deutsche Bank), 코메르츠 은행(Commerzbank) 등 독일의 전통 은행 지점을 통해 법인 통장을 개설했다는 사례는 거의 찾기 힘들다. 오히려 프랑스 핀테크 스타트업이 만든 디지털 은행인 콩토(Qonto), 네덜란드 핀테크 스타트업 피놈(Finom)이 이 창업자들이 대안으로 찾는 솔루션이다. 하지만 이 디지털 은행은 외국으로의 송금, 각종 이용 수수료, 현금 입금 등 몇 가지 서비스에서 기존 은행보다 여전히 불편함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이번 아시아베를린 앰버서더 회의에서 베를린시는 베를린의 지역은행 중 하나인 베를린 슈파케세(Sparkasse)의 기업 고객 담당자를 초청하여, 실제 은행에서 KYC를 하는 과정, 현 시국에 왜 법인통장 개설이 어려운지,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은행과 각국의 대사관, 베를린 시가 어떻게 공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스타트업 투자자인 앰버서더들이 매우 소리 높여 독일 은행의 보수성을 비판했다. 일례로 독일에서 일반 시중 은행의 계좌를 개설하지 못해, 투자가 지연되어 결국 런던으로 이주한 스타트업의 사례도 소개되었다.
베를린이 스타트업 허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베를린의 개방성과 혁신성이 있다. 베를린은 외국인 창업가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활기를 띠었다. 여기에 아시아베를린과 같은 이니셔티브는 도시의 개방성과 혁신성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베를린이 진정한 글로벌 스타트업 허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특히 외국인 창업자들이 겪는 비자 문제와 법인 통장 개설 문제는 여러 과제 중 일부에 불과하다. 베를린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실제 이 생태계에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당사자들과 함께 더욱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외국인 창업자와 투자자들이 베를린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점뿐만 아니라, 이 도시의 다양성과 포용성 때문이다. 베를린은 이러한 강점을 더욱 강화하여, 진정한 글로벌 스타트업 허브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시아베를린 앰버서더를 한 명씩 불러모아 27년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 이 이니셔티브는 스스로를 ‘우리는 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견인하는 팀 베를린’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팀에는 국적이 독일인인 것이 전혀 중요치 않다. 베를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베를리너가 주역이다. 베를린이 매년 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도시로서,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희망을 주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은서 123 팩토리 대표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에코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123 팩토리의 대표다. 독일 베를린에 기반을 두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스타트업, 글로벌 기업,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인큐베이터, 글로벌기업, 정부 기관 등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