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엔 'AI 로비스트'만 3400여명 "규제 피하자"…불붙은 테크 로비錢爭

입력 2024-07-10 18:15
수정 2024-07-11 00:33
#. 유럽연합(EU)의 인공지능(AI) 규제법 논의가 한창이던 2022년 6월. 오픈AI 임직원 3명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들을 비밀리에 만났다. 범용 AI 시스템이 고위험 AI로 분류돼 강력 규제 대상에 오르는 게 우려된다는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월 최종 승인된 EU의 AI법에서 범용 AI는 고위험 AI와 다른 기술로 분류됐다.

#. 페이스북 운영사 메타는 작년 한 해에만 미국의 로비 전문 회사 5곳에 AI 로비를 의뢰했다. 지난해 10월 조 바이든 정부가 AI 행정명령을 발표할 무렵이다. 메타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1700만달러(약 235억원)가 넘는 돈을 미국 워싱턴 로비 활동에 지출했다. 치열해진 ‘AI 로비 전쟁’
글로벌 AI 규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주요 기술 기업이 미국과 유럽 의회, 정부를 상대로 전방위적 로비를 벌이고 있다. 10일 로비 추적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미국에서 AI 로비를 한 기업·기관은 2022년 153곳에서 2023년 451곳으로 1년 만에 3배 급증했다.

지난해 1분기엔 323명의 로비스트가 백악관에 AI 로비를 했는데, 4분기엔 AI 로비스트 수가 931명으로 늘었다. 올해 1분기에만 메타는 760만달러(약 105억원), 구글은 310만달러(약 43억원)를 미국 내 AI 로비에 썼다. 오픈AI의 대관 담당 직원은 지난해 초 3명이었지만 지금은 35명이 됐고, 연말엔 50명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작년에 AI 로비를 한 기업 451곳 중 334곳은 지난해 처음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로비와 거리가 멀었던 기업들까지 AI 로비 전쟁에 돈을 싸 들고 참전한 것이다. 오픈AI 대항마로 불리는 앤스로픽,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앤드리슨호로위츠,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 등이 지난해부터 로비를 시작했다.

2023년 한 해 동안 AI 로비를 진행한 기업·기관들이 미국 연방정부에 쓴 금액은 9억5700만달러(약 1조4250억원)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AI 로비스트는 2022년 1552명에서 지난해 3410명으로 늘었다. 닐 칠슨 어번스인스티튜트 정책이사는 “실리콘밸리는 원래 워싱턴과 소통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며 “새로운 문화(로비)가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AI 규제의 선봉에 서 있는 유럽에도 기업들이 몰려가고 있다.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이 유럽 내 ‘테크 로비’의 핵심이다. 지난해 EU 집행위 고위 관계자의 78%가 기업들과 AI 관련 미팅을 했다. 프랑스 미스트랄AI는 브뤼셀에 로비 사무소를 열었고, 독일 알레프알파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독일 정부 회의에서 12번 의견을 냈다. 돈 쏟아 규제 줄인다
기업들이 AI 로비에 공을 들이는 것은 AI 규제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어서다. 2021년 AI법 초안을 내놓은 EU는 지난 5월 세계 최초로 법을 승인했다. AI 활용 위험도를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해 차등 규제하는 게 핵심이다. 고위험 AI를 서비스하다가 중대한 법 위반을 하면 매출의 최대 7%까지 벌금을 매긴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10월 정부의 AI 행정명령 발동 전후로 로비가 급증했다. 행정명령은 AI 개발사가 안전시험 결과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업들의 공식 입장은 AI 기술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적절한 법적 규제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밑에선 규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의 정책 분석가인 대니얼 루퍼는 타임지 인터뷰에서 “기업들은 겉으로는 ‘규제해달라’고 하지만 실제론 반발한다”며 “이들 주장의 핵심은 ‘자율 규제를 할 테니 믿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AI는 핵무기급 파급력”지난해 글로벌 AI 투자액은 1419억달러(약 196조원). 이 중 미국 투자액이 62%였다. 2위인 EU 비중은 8%, 중국은 7%로 미국과 차이가 컸다. 미국의 독주가 이어지다 보니 로비 양상이 복잡하다. 자국에서는 규제 완화를 주장하지만, 해외 기업엔 다른 잣대를 적용해달라는 요구가 상당하다. 구태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부의장은 쏟아지는 AI 규제에 대해 “미국은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고, 유럽은 AI산업의 밑동을 자르고 있다”고 비유했다.

각국 정부의 고민도 커졌다. 초거대 AI 기업들이 기술을 독점하면 안보 영역에서 정부를 위협할 수 있어서다. 뉴욕타임스(NYT)는 “EU는 물론 미국 정부까지 자국 빅테크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반독점 조사를 하는 것은 거대 기술 기업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빅테크들은 규제 리스크 대응을 위해 주요 AI 서비스 출시를 늦추고 있다. 메타는 AI 챗봇인 ‘메타AI’의 유럽 출시를 보류했다. EU 당국이 메타AI가 SNS에 공개되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학습할 수 있다고 지적한 영향을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자사 AI PC의 핵심 기능으로 내세운 ‘AI 리콜’ 서비스를 연기했다.

앞으론 AI산업 자체가 글로벌 규제의 폭과 속도에 맞춰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AI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쏟으며 기술력 경쟁을 했다면 앞으론 정책 관리에 더 신경을 쓰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란 얘기다.

일각에선 AI 윤리와 건강한 기술 경쟁을 강조해온 신규 AI 기업들이 대관 업무에만 힘을 쏟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오픈AI와 법률 분야 협업을 했던 한 관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예전에 진짜 AI 정책 전문가들을 끌어모았던 오픈AI가 지금은 평범한 기술 로비스트만 고용하고 있다”며 “이전 빅테크들이 10년 넘게 해온 것과 똑같은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