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북한의 최광 인민군 총참모장이 중국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폭격을 준비하던 때였다. 최광을 만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핵무기 개발 자제를 요구하면서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로 북한을 안심시켰다.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며 내세운 이유도 “입술(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고, 문이 무너지면 집이 위험하다”였다. 서로에 대한 전략적 필요성이 큰 양국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6·25전쟁을 통해 혈맹이 된 북한과 중국이지만 늘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전 이후 1인 절대권력 구축에 나선 김일성은 남로당파·소련파에 이어 친중 연안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1956년 연안파 숙청 직후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을 찾은 북한 고위층에게 “당신들 당내에는 공포가 넘쳐흐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김일성에게) 주의를 준 적이 있다”며 불만과 경고를 전했다. 북한은 때마침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그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치며 이득을 챙겼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중국과 충돌했다. 중국의 홍위병들은 김일성을 ‘비곗덩어리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북한 주민은 마오를 ‘노망든 늙은이’라고 조롱하는 등 양국 관계가 험악해졌다. 그 뒤에도 한·중 국교 수립, 북한의 핵실험 등 여러 차례 큰 고비가 있었지만 북·중 관계가 파국으로까지 치닫는 일은 없었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한 뒤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해 김정은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기는 했어도 중국에 북한은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수교 75주년을 맞은 올해 양국 관계가 다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최근 중국이 10만 명에 달하는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를 전원 귀국시키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해외 파견 노동자가 김정은 체제를 유지하는 ‘돈줄’임을 감안하면 고강도의 북한 길들이기에 나선 셈이다. 무역 분야 통제도 강화해 군사동맹 부활 등 러시아에 밀착하는 북한에 경고장을 내밀었다. 일단 반미(反美)로 뭉쳤지만 북·중·러의 셈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 외교당국이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