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반에 출근해 오전 내내 빌딩 20곳 위아래를 오가죠. 직원들이 원하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같은 건물을 하루 다섯 번 찾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전국에서 출근 시간이 가장 빠르다는 여의도 증권맨이지만 이들보다 한발 앞서 여의도의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 '야쿠르트 아줌마'로 불리던 hy(옛 한국야쿠르트) '프레시 매니저'들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아침 업무 시작이 이른 만큼 여의도의 프레시 매니저들도 일찍 움직입니다.
올해로 4년차 프레시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설희정 매니저의 출근시간은 오전 3시 30분입니다. 서울 영등포구 동여의도 증권사 빌딩들을 누비는 그는 증권사 사장보다도 먼저 건물에 들어섭니다. 아침이 바쁜 증권가 임직원이 도착하기 전 자리에 야쿠르트를 비롯한 hy의 제품을 놓아두는 일이 그의 임무죠.
출근부터 퇴근까지 그의 동선을 짚어봤습니다. 증권·금융사 건물들뿐 아니라 지하에 식당들을 갖춘 오피스 빌딩들도 그의 구역이었습니다. 설 매니저는 "한국증권금융 건물에서 시작해 신영증권 별관, 농협재단 빌딩, 한양·부국증권을 거쳐 코스콤, 예탁결제원, 신영증권 본관 등에 우선 들린다"며 "중앙·대영·유성·정곡·태양·중앙·호성·외교·고려·제일·경도 빌딩을 방문한 후 아일렉스타워에서 오전 일정을 끝내고 점심께 거리에서 제품을 판매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설 매니저의 눈에 담긴 여의도는 어떨까요. 그는 '총성 없는 전쟁터'에 빗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정장에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담배를 피우다 들어가는데, 하품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이들이 음료를 가장 많이 사가는 시간대는 다른 동네보다 한두 시간 빠른 오전 7시~9시 사이입니다. 설 매니저는 "증권맨들 저녁자리가 많아서인지 아침 일찍 간 건강 음료인 '쿠퍼스'를 20~30개씩 사가는 임원들이 많다"며 "영업직은 계약직이 많은데 '자신은 파리목숨'이라고 토로하며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고객을 볼 때마다 절로 응원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13년째 프레시 매니저 활동을 한 문양금 매니저는 활동 지역인 IFC 오피스 인근에 '마음으로 낳은 아들·딸'이 많습니다. 문 매니저는 "어느 증권사는 들어서면 딸 같은 직원들이 달려와서 안아주고 '엄마 왔냐', '이모 왔냐' 한다"며 "사는 게 모두 힘들고 어렵지만 음료 건네주면서 주고받는 그 몇 마디가 참 따뜻하다"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여의도역 인근 증권가에서 활동하는 매니저만 총 15명입니다. hy에 따르면 영등포구 내 증권사가 많이 모인 동여의도 지역의 인기 제품은 위와 장 건강 관련 발효유가 꼽혔습니다. 해당 지역 판매량 중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의 판매 비율이 35%로 압도적이고, 간 건강 음료인 쿠퍼스(13%)가 뒤를 이었습니다. 여러 대의 모니터를 쳐다보며 장시간 앉아있는 직장인들이 많고 음주도 잦은 편인 만큼 발효유 제품 인기가 높다는 게 매니저의 해석입니다. 야채 주스 음료인 하루야채(10%)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직장과 상가 비중이 92%에 달할 만큼 '직장인 천국'인 여의도에서 hy 제품 배달 서비스 이용인원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요. 금융감독원이라고 합니다. 전체 직원의 10%를 웃도는 220여 명이 음료를 매일 배달받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한투자증권타워'와 'IFC 오피스', 'LG트윈타워', '여의도 우체국' 등 순으로 많은 직원들이 hy 제품을 구독 중입니다.
이렇게 인기가 높다보니, 프레시 매니저가 올리는 연매출은 억대에 달합니다. 설 매니저와 문 매니저 모두 고정 배달과 길가에서의 유동 판매를 합하면 월 평균 매출이 1000만원(근무시간 약 6시간·월 평균 수익 약 250만원)가량이라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다져진 관계답게, 프레시 매니저와 증권가 소비자들의 사이는 끈끈합니다.
설 매니저는 "최근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가 지나가는 시간인 7시에 회사 앞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기다리는 증권사 임원 두 분이 계신다"며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들과 매일 같은 시간 눈인사를 하며 친해진 게 지금까지 왔다. 커피 한 잔에 담긴 그 따뜻한 마음이 카트를 더 힘차게 끌게끔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 매니저는 또 "다들 언니, 여사님, 이모 하면서 그날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는데 이 일을 그만두면 그 역할은 누가 해주나 싶다"며 "외로워 울 사람들이 걱정돼 이 일을 못 그만둔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10년 넘게 요구르트 배달 서비스를 구독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한자산운용의 한 직원은 "코로나19 시기 땐 회사 빌딩에 출입 제한령이 내려져서 매니저들이 건물을 들어오질 못해 아쉬웠는데 이젠 눈을 보고 인사하며 음료를 받아볼 수 있어서 기쁘다. 우리들은 의리로 다져진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모 증권사 홍보실 한 직원은 "처음에는 아침끼니 대용으로 '나도 마셔보자'는 생각에 구독했는데 정이 쌓여 그 기간이 벌써 10년이 됐다. 누군가가 매일 챙겨주는 기분이 들어서 작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숫자가 곧 성적표.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경쟁자가 되기도 하는 여의도입니다. 어느 동네보다 경쟁이 심한 지역으로 꼽히는 여의도가 '요구르트 카트'를 꼭 붙들고 있는 것은 사람냄새와 인정에 대한 갈증 때문이 아닐까요.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