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두 개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 같은 여성 과학자를 키우는 것이 솔베이의 목표입니다.” 지난달 27일 이화여대와 맺은 협약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일함 카드리 사이언스코 회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자대학으로 세계 최초의 공대를 설립한 이화여대를 적극 지원하는 이유”라며 이같이 말했다. 사이언스코는 벨기에 최대 화학회사 솔베이(2022년 기준 매출 134억유로, 영업이익 22억유로)의 소재전문 자회사다. 카드리 회장은 솔베이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사이언스코 회장에 오른 첫 여성 임원으로 2019년 포천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21위에 이름이 올랐다.
160년 전통의 글로벌 소개 기업인 솔베이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이대에 연구비 투자와 장학금으로 66억원을 지원했다. 지난해 말 솔베이에서 분사된 사이언스코는 새로운 협약을 맺고 앞으로 10년간 50억원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벨기에의 회사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아시아의 여자대학에 이런 지원을 하는 이유는 여성 과학자를 키우겠다는 철학 때문이다. 솔베이 창립자인 어니스트 솔베이는 1911년 물리·화학 분야 주요 아젠다를 다루는 솔베이회의를 창설했고, 마리 퀴리는 1회 대회부터 참여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였다. 카드리 회장은 “탁월한 인재를 보유한 이대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벨기에 회사가 한국의 여자대학에 100억원 넘는 지원을 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요.
“어니스트 솔베이가 기부한 기금으로 1911년 시작된 솔베이회의는 양자 물리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 오펜하이머 등 당대 유명 과학자가 모두 참석했지요. 특히 솔베이는 이 회의에서 활약하고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퀴리에 주목했습니다. 그와 같이 노벨상을 받는 여성 과학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를 위해 이대처럼 공대에 있는 대학을 찾아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원하는 것입니다.”
▷이대를 어떻게 찾아냈나요.
“세계적으로 공대가 있는 여대는 많지 않습니다. 미국, 일본 등에 유명한 여대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리버럴 아트컬리지 같은 인문대 중심입니다. 전 세계 여대 중 공대를 처음으로 만든 곳이 이대였습니다. 저희가 지원을 결정할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공대를 보유한 여대라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이대와의 협력이 사이언스코에도 도움이 됩니까.
“회사에 필요한 인재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대에는 화학,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있기 때문이죠. 사이언스코는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 인재가 필요합니다. 이대에 투자하고 연구소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혁신을 연구할 수 있었고, 동시에 훌륭한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언스코에 한국 인재들이 있는지요.
“사이언스코 연구혁신센터 책임자가 이대 출신입니다. 사이언스코의 장학금을 받은 63명 중 교수, 박사 후 연구원이 된 학생도 있고 사이언스코 직원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
▷이대·사이언스코 연구센터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연구센터에서는 배터리 전기화, 녹색수소, 반도체 등 중요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사업을 위해 꼭 필요한 연구죠. 앞으로 10년간 혁신을 가져올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개발보다 혁신을 중시하는 기업문화인데요.
“혁신은 기업이 생존하고,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코는 연구개발(R&D)이 아니라 연구혁신(R&I)을 강조합니다. 사이언스코는 전 직원 1만4000명 중 50%가 연구와 혁신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투자도 아끼지 않습니다. 매출의 5%를 혁신에 투자하는데 이는 동종업계 평균(2.8%)의 두 배 가까운 수치입니다.”
▷기업 혁신을 위한 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대학이야말로 세상의 판을 바꿀 수 있는 게임체인저입니다. 혁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재인데, 이를 키우는 곳이 대학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는 AI로 대체할 수 없는 창의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합니다. 또 대학은 철학적 수준에서 새로운 대안을 고민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의 화학, 생화학 등 과학 영역은 전통적인 학문 방식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대학과의 협력으로 미래 리더를 양성하는 이런 협력은 기업과 사회에 큰 이익을 줍니다. ”
▷최근 한국 기업을 인수했습니다.
“세라마이드를 주력으로 하는 진영바이오를 인수했습니다. 세라마이드는 인간 피부 각질에 있는 세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피부 수분을 유지하는 보습 효과가 있어 화장품에도 들어갑니다. 이번 인수로 사이언스코는 생명 공학 기반 기술을 통해 화학을 재구성하는 걸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 인재를 키우기 위한 선행 조건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분야에 여성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합니다. 다양성은 기업 생존을 위해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성 과학자들이 출산 시기에 경력에서 이탈하는 것은 기업과 국가 모두에 손해입니다. 이를 막기 위한 방안이 필요합니다. 사이언스코는 출산한 직원에게 16주의 휴가를 줍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직원도 같은 기간의 휴가를 받습니다. 성별 간 임금 격차도 없애야 합니다. 이는 여성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의 영역입니다.”
▷한국의 여성 인재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요.
“저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기 위해선 남편의 집이나 무덤으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저에게 번영과 자유로 가는 문을 열어줬죠. 큰 꿈을 꾸세요. 그 꿈이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충분히 크지 않은 것입니다.” 일함 카드리 회장은 10代 시절 난독증 극복
글로벌 화학사 솔베이 첫 여성 CEO 오르기도일함 카드리 사이언스코 회장은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다. 여성의 자립과 교육이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문맹이면서 청소부 일을 하는 할머니 밑에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13세가 될 무렵 난독증이 있음을 알게 되고 학교에서 열등아로 취급받았지만 이를 극복해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루이파스퇴르대에서 물리 및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9년 여성으로는 처음 글로벌 화학기업 솔베이의 최고경영자(CEO)에 오르기 전까지 셸, UCB, 다이버시케어 등 다국적 기업에서 일했다. 2019년 포천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2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23년 말 솔베이가 사이언스코를 분사하면서 사이언스코 회장을 맡았다.
모회사인 솔베이는 화학 교과서에 나오는 ‘솔베이공법’의 창시자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1863년 설립한 회사다. 솔베이공법은 염화나트륨과 탄산칼슘을 반응시켜 염화칼슘과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것이다.
창업주인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이 공법을 바탕으로 솔베이를 설립했다. 여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3년마다 열리는 솔베이회의를 만들어 과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솔베이는 세계 50여 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솔베이는 지난해 말 전자, 항공, 헬스케어 등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을 분리하며 사이언스코를 설립했다.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서다. 사이언스코는 전기 자동차용 특수 폴리머, 항공우주 산업용 경량 재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
■ 약력
△1969년 모로코 카사블랑카 출생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졸업
△프랑스 루이파스퇴르대 박사
△2013~2019년 다이버시케어 CEO
△2019년 포천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21위
△2019~2023년 솔베이 CEO
△2023년 12월~ 사이언스코 회장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