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많은 아픔을 겪었던 화가. 우리가 아는 위대한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길, 꿈 많던 18세 소녀의 가녀린 몸은 느닷없는 교통사고로 철근에 꿰뚫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소녀가 꿈꾸던 미래와 평온한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끝내 다리 한쪽을 절단하고 맙니다. 결혼 생활이 준 정신적 고통은 더했습니다. 형편없는 바람둥이였던 남편은 허구한 날 외간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동생에게까지 손을 댔습니다. 프리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다친 게 아니라, 부서졌다.”
그랬던 프리다를 구원한 건 그림이었습니다. 프리다는 자신의 삶과 아픔을 그림에 그대로 솔직하게 담아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마침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끊임없이 몸과 마음에 밀어닥치는 비극, 그럼에도 당당히 고통을 마주하고 인생을 예찬하며 불후의 명작을 남긴 화가. 프리다의 ‘그림 같은 삶’은 지난 수십년간 책과 영화 등 수많은 콘텐츠에서 다뤄졌고, 이 과정에서 프리다는 하나의 신화이자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비극을 당한 사람도, 당하고만 있었던 사람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애정결핍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간절히 원했던 악동. 관심을 끌기 위해 연기를 하고, 불필요한 수술까지 받았던 타고난 배우.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편이 존경하는 할아버지와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내친김에 할아버지의 비서와도 바람을 피운 거침없는 여성이었습니다. 오늘은 근래 발견된 기록들과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 프리다’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 봅니다. 내겐 관심이 필요해프리다의 가정은 ‘사랑이 가득한 집’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온 사진기사 아버지는 머리가 좋았지만 말수가 적고 우울한 남자였습니다. 가끔은 신랄한 독설을 하곤 했습니다. “나는 인물 사진을 찍는 게 싫어. 신이 못생기게 만든 얼굴을 굳이 바로잡고 싶진 않거든.”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선택한 것도 ‘전 남자친구가 독일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전 남자친구는 비극적인 사랑 끝에 어머니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가끔 전 남자친구가 줬던 편지들을 꺼내 보곤 했습니다.
프리다는 아버지에게서 좋은 머리와 신랄한 유머 감각을, 어머니에게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사랑에 관한 어두운 열정을 물려받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이런 프리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외아들, 즉 프리다의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프리다를 가졌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떠나간 아이를 대신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하지만 떠나간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법. 부모는 프리다를 낳은 후 그 사실을 깨닫고 말았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어린 프리다를 보모에게 맡겼습니다.
프리다는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습니다. 여섯 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장애도 얻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다리를 절뚝이는 프리다를 ‘나무 다리 프리다’라고 놀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똑똑하고 씩씩하게 자라났습니다. 의사를 꿈꾸며 학교에 들어갔고, 여러 친구를 사귀며 장난꾸러기로 자라났습니다. 당나귀를 타고 학교 복도를 질주하는 등 여러 일도 벌였습니다. 관심을 달라는 프리다 나름의 표현이었습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프리다의 편지에 항상 이런 말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5년, 열여덟 살의 프리다는 인생을 뒤흔드는 사고를 당합니다. 하굣길에 탄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면서 허리와 골반, 오른쪽 다리와 팔 등에 중상을 입은 겁니다. 석 달의 입원 동안 프리다에게는 사람들의 위로와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프리다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가 발병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하던 부모님이 극진한 간호를 하며 관심을 쏟았던 것도, 자신이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리다의 무의식에는 이런 공식이 각인됐습니다. ‘고통=사랑과 관심.’ 그래서 프리다는 입원 중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고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프리다가 첫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친구들이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리다는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된 후에도 자신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를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많은 화가처럼 “나는 천재로 태어났다”라느니, “붓을 쥐고 태어났다”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로 누워 있기 전까지 나는 그림을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뭐든 해야 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고 연출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던 프리다가 이랬던 건, 자신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생 가장 중시했던 자신의 정체성은 바로 ‘디에고의 연인’이었습니다.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고를 겪었다. 내 몸을 부순 버스 사고, 그리고 마음을 부순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 그중에서 두 번째 사고가 더 끔찍했다.” 프리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디에고는 끔찍한 바람둥이였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은, 엄밀히 말하면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뜯어말리는데도 디에고를 선택한 건 바로 프리다였습니다.
이성을 마구잡이로 만나고 다니는 바람둥이를 보면 의외로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이성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조금 친근하고 허술한 외모일 때가 많지요.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카사노바도 조각 미남은 아니었다고 하니까요. 반면 이들은 말을 잘하고, 이성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반전 매력’이 있습니다. 위대한 화가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던 디에고 리베라가 바로 그랬습니다.
많은 여성이 디에고에게 몸과 마음을 기꺼이 던졌습니다. 뚱뚱하고 괴팍한 데다 “젊은 여자 고기를 먹어봤는데, 쌈 싸 먹으면 맛이 좋다”느니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떨어댔지만 그게 밉게 보이지 않는 특이한 매력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디에고는 당시 세계적인 유명 인사였고, 그와 만났다는 건 일종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디에고에게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의 매력에 더해 ‘이 남자를 나에게 정착시키고 싶다’는 일종의 도전 의식이나 정복 욕구가 한몫했습니다. 프리다에 앞서 결혼한 두 명의 여성이 그랬고, 프리다도 그랬습니다. 벽화 작업을 하는 디에고를 처음 본 프리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뒷발로 서 있는 청개구리 같아. 배는 구(球)처럼 매끄럽고 팽팽한데, 가슴은 축 늘어져 있어. 너무 귀여워. 나중에 그와 결혼할 거야. 그리고 그를 아기처럼 씻겨 줄 거야.’
‘프리다는 무관심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하지만 자기 모습 그대로는 관심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 흥미롭고 바람직한 사람이 되려면 다른 사람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 수단이 뭐가 됐든.’ 생전의 프리다와 이야기했던 심리학자는 그녀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지만 일과 연애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하는 아기 같은 남자. 그런 디에고의 아내는 프리다가 원했던 바로 그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리다가 디에고를 이용하기 위해 결혼했다는 건 아닙니다. 뒤틀리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습니다. 훗날 이혼을 겪은 후에도 프리다는 디에고를 살뜰히 챙겼고, 항상 디에고의 곁에 자신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프리다가 디에고보다 사랑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단 한 명, 디에고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딸이 21살 연상의 못난 바람둥이, 그것도 두 번이나 이혼했던 남자와 결혼하는 걸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프리다의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할 비용을 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디에고는 부자였으니까요. 둘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프리다가 스물두 살, 디에고가 마흔세 살 때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부의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코끼리와 비둘기가 결혼한 것 같구먼.”
두 배로 갚아준다역시나 디에고는 미친 듯이 바람을 피워댔습니다. 프리다가 각오했던 것보다도 디에고의 바람기는 더 심했습니다. 디에고도 프리다를 사랑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낙태는 프리다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첫 번째는 1929년, 두 번째는 1932년(낙태약을 먹은 뒤 얼마 안 돼 유산)이었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건강이 위험하다’는 게 핑계였습니다. 하지만 의료 기록에 따르면 프리다는 임신이 가능했고, 제왕절개를 통해서라면 출산도 가능했습니다. 학자들은 ‘프리다가 아이를 가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프리다는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면 디에고가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웠습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연인이자 아기였습니다. 프리다는 디에고가 목욕할 때 아기 장난감을 욕조에 띄워 줬고, 아기를 씻기듯 몸을 닦아 줬다고 합니다. 디에고와 단둘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게 프리다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에고는 선을 넘어도 너무 심하게 넘어버렸습니다. 이런 프리다를 배신하고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른 겁니다. 디에고의 수많은 불륜을 ‘불장난’으로 여기던 프리다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리다도 엄청나게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이었던 디에고는 눈에 불을 켜고 프리다를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프리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1934년 사건입니다. 당시 프리다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디에고가 눈치를 채고 대문을 두드리자, 노구치는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습니다.
옷을 다 입고 양말을 얼른 발에 끼우려는 그 순간. 갑자기 강아지가 양말 한쪽을 물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결국 노구치는 양말을 한쪽만 신은 채 나무로 기어올라 지붕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들이닥친 디에고. 그는 강아지가 물고 있는 양말을 보고 모든 사태를 직감했습니다. 바로 총을 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노구치를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뚱뚱한 디에고는 노구치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1934년 프리다는 유산을 겪는데, 이때 유산된 아이는 노구치의 아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학자들의 얘기입니다.
프리다가 1937년 거의 환갑이 다 된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와 바람을 피운 것도 복수를 위해서였습니다. 트로츠키는 디에고의 존경하는 친구이자 정치적인 우상. 당시 트로츠키는 디에고의 초청을 받아 멕시코를 방문 중이었습니다. 프리다는 남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트로츠키를 적극적으로 유혹한 뒤 바람을 피우고 내다 버렸습니다. 내친김에 트로츠키의 비서까지 유혹해 버렸습니다. 어쨌거나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아내가 바람을 피웠으니, 디에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1939년 두 사람은 이혼을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끊임없이 상처입히는 파괴적인 관계였지만, 프리다는 이혼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1940년 ‘머리를 자른 자화상’은 이런 상실감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머리카락, 머리를 잘랐으니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네.’ 오른손에 든 가위로 머리를 잘라냈듯 디에고와의 관계도 잘라내 버린 쓸쓸함이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프리다가 화가로서 자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프리다의 독창적이고 진정성 있는 그림은 미국과 프랑스 등 해외 주요 단체전에 전시되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온 추상미술 거장 칸딘스키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프리다를 껴안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카소도 작품을 극찬하며 귀고리 한 쌍을 프리다에게 선물했습니다. 언론은 프리다의 작품을 “탁월한 초현실주의 미술”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다만 프리다는 이런 열광 섞인 반응에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작품이 팔릴 때마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돈으로 더 좋은 걸 살 수 있었을 텐데, 좀 미안하네.” 초현실주의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호들갑이야? 나는 무슨 주의나 이런 거 몰라. 그런 거 없어. 내 삶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프리다에게 그림은 자신의 현실을 생생하게 표현한 결과물이었던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자 디에고는 다시 프리다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프리다, 든든한 아내를 잃은 디에고 모두 서로의 빈 자리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결국 둘은 1940년 재결합합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프리다라는 배우프리다는 항상 아팠습니다. 평생에 걸쳐 30번이 넘는 수술을 받았고, 재활을 위해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뎠습니다. 그런데도 증상은 계속 나빠졌습니다. 프리다는 이런 고통이 모두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프리다의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뒤틀린 골격, 독주를 하루에 한 병씩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생활 습관, 그리고 불필요한 수술의 후유증이 더 큰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프리다가 받았던 수술 대부분은 받을 필요가 없는 수술이었다. 프리다가 생각하는 것만큼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컸다면, 프리다는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강박적으로 수술을 받고 싶어 했다.” 프리다를 생전에 알던 사람들과 학자 중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프리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아프지 않으면 디에고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디에고는 여러 번 이별을 생각했지만, 계속 수술을 받는 프리다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잘못된 척추뼈에 금속판을 넣는 등 일부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수술이 고통을 더했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투여한 마약성 진통제(모르핀)가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프리다가 뮌하우젠 증후군(신체적인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과장하는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견해도 일각에서는 제기됩니다.
프리다는 ‘고통을 이겨내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습니다. 프리다의 연기는 강렬하고 경이롭고 인간적이었지만, 병적이었습니다. 1953년 프리다가 마지막으로 연 개인전 개막식에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시 개막을 얼마 안 남긴 상황, 프리다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의사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참석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프리다는 민속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구급차에 실려 침대째로 개막식에 참석했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면 현명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환호했고 프리다는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해,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바꿔놓을 다리 절단은 프리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발가락들이 썩어들어 가고 있어요. 절단해야겠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프리다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욕설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프리다는 심각한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마흔일곱 살이던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삶을 마감합니다. 감염이 악화돼서였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프리다가 마지막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기쁘게 마지막을 기다립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그 모든 게, 인생프리다의 고통과 눈물, 비극, 천재적인 재능은 분명히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비극을 이용하려는 욕구가 있었고 그렇게 했었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일부 고통은 자초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리다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빛바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결함에 대한 열등감,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프리다는 여기에 거세게 맞섰습니다.
프리다는 늘 자기 삶에 당당하고 솔직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긴 했지만, 관심을 원하고 즐겼을 뿐 남이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형편없는 바람둥이를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랑했을지언정 후회 없이 진심을 다했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은 디에고 같은 남자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털어놓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둑에 물이 흐른다고, 흙이 비가 온다고, 원자가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고통받지 않듯이 나와 디에고의 만남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달갑잖게 다가올 수도 있는 프리다의 숨겨진 이야기를 꺼낸 건, 이런 태도를 알면 그의 마지막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을 긍정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그림에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 프리다는 삶에 빛과 어둠, 행복과 고통이라는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습니다. “우주의 법칙. 고뇌와 고통, 쾌락과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다.”
때로 어떤 위인들은 너무나 위대해서 멀게만 느껴집니다. 모든 역경과 고난을 강철같은 의지 하나로 뚫고 나가는 그 모습은 당연히 모두의 존경을 받을 만하지만,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에게는 도저히 본받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리다는 아닙니다. 그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성격적인 결함이 적지 않았고 잘못이나 실수도 여럿 저질렀습니다. 굳이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부분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프리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인생의 모든 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결점과 고통이 오히려 우리를 독특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모두 인생이고, 창조의 원천이니까요. 그리고 이를 두려움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에 녹였습니다. 모든 고통받고 박해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프리다 작품의 감동은, 그래서 프리다의 결점까지 속속들이 알 때 더욱 깊어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에 나온 프리다 칼로의 내면에 관한 해석 등은 Salomon Grimberg가 프리다의 생전 심리치료사 등을 인터뷰해 저술한 책 Frida Kahlo: Song of Herself에 기반한 것입니다. 프리다에 관한 전기 중 가장 권위있는 Frida의 저자 Hayden Herrera가 추천한 책입니다. 기본적인 팩트는 Hayden Herrera의 Frida(번역서명 프리다 칼로)를 기반으로 서술했고,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안진옥 옮기고 엮음) 프리다 칼로(수잔 바르브자 지음, 박성진 옮김)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르 클레지오 지음, 백선희 옮김) 프리다 칼로(크리스티나 버루스, 김희진 옮김) 등을 함께 참조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