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대승을 거둔 것은 보수당 집권 기간 악화한 경제 상황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해외 투자가 감소하고 유럽연합(EU)과의 교역은 급감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는 급등했다. 악화한 재정으로 공공의료가 붕괴 수준에 이르는 등 공공서비스의 질도 나빠졌다. 노동당이 제대로 된 친시장 정책을 펼치지 않는 이상 영국 경제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노동당, 중도 정책 전환으로 승리영국 가디언은 4일(현지시간) 선거 결과에 대해 “노동당을 원하는 민심 때문이 아니라 ‘안티 보수당’ 투표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노동당은 선거에서 400석 이상을 휩쓸었으나 득표율은 33.7%로 이전 선거보다 1.6%포인트 높아지는 데 그쳤다. 최근 선거가 치러진 유럽 대륙 각국에선 대부분 좌파 정당이 고전했다.
노동당은 키어 스타머 대표의 중도적 정책 전환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분석이다. 노동당은 영국 에너지산업 국유화 정책, 대학 등록금 폐지, 초고소득자 소득세 인상과 같은 진보적 공약을 철회했다. 개인 소득세와 국민보험(NI) 요율, 부가가치세, 법인세 동결도 약속했다.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5%까지 증액하고, 이민자 단속도 강화하기로 했다.
급격히 오른 생활물가는 이번 선거의 승부를 가른 요인으로 지목된다. 2022년 10월 물가상승률이 연 11.1%에 이르렀고, 천연가스 가격 폭등으로 난방을 못하는 가정이 속출해 정부가 전국 3000곳의 대피소(warm banks)를 마련하기도 했다. 최근 물가 상승세는 둔화했으나 식품 가격은 2022년 초보다 25% 높은 수준이다. 기준금리는 16년 만의 최고 수준인 연 5.25%로 유지돼 주택담보대출 등의 이자 상환에도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 보트 거주자, 스페인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나올 정도로 악명 높은 주거비 문제가 여전하다. 코로나19 이후 경제 회복 속도도 더디다. 싱크탱크 공공정책연구소(IPPR)에 따르면 민간 투자가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해 작년 GDP 증가율이 0.1%에 그쳤다. ○스타머, 경제 문제 해결 난망
스타머 신임 총리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선거 기간 대규모 정부 지출이 불가피한 공약을 대거 내세웠기 때문이다. 보수당 정부의 공공 지출 삭감으로 국민보건서비스(NHS) 병원 진료에 대기 중인 환자가 75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공공의료는 상황이 악화했다. 노동당은 5년 내 주택 150만 채 건설. NHS 진료 예약 매주 4만 건 추가, 청정에너지 공기업 신설, 공립학교 교사 6500명 신규 채용 등을 약속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 조세 회피 단속 강화와 사립학교의 20% 부가가치세 면세 폐지를 거론했지만 역부족이란 평가가 나온다. 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는 “노동당 공약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세금을 올리거나 정부 부채를 늘리거나 공공 서비스 예산을 깎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 부채는 2019년 GDP의 85.4%에서 작년 말 101% 수준으로 불어났고, 지난해 재정적자도 GDP의 6%인 408억파운드(약 72조원)에 달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이민자 문제도 과제로 남을 전망이다. 이민자를 줄이고자 브렉시트를 감행했음에도 2023년 합법 이민자만 68만5000명으로 브렉시트 직전인 2015년 33만 명의 두 배가 넘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