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급발진 주장' 택시운전자, 페달블랙박스 봤더니… [이슈+]

입력 2024-07-05 10:53
수정 2024-07-05 14:06


지난 1일 밤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13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교통사고의 가해 차량 운전자가 사고 원인으로 '차량 급발진'을 주장했다.

사고 원인을 두고 급발진, 운전 미숙, 부주의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됐다.

현재 갈비뼈 골절로 입원 중인 시청역 역주행 사고 운전자 A(68)씨는 사고 직후 "브레이크를 계속 밟았으나, 차량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4일 A씨가 입원해있는 서울대병원을 찾아 첫 피의자 조사를 진행했다. A씨는 이날 조사에서도 "사고 당시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딱딱했다"며 차량 상태 이상에 따른 급발진을 재차 주장했다.

차량이 갑자기 급가속을 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작동하지 않아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1974년에 면허를 취득한 후 현재 버스 운전을 하는 '베테랑 운전사'인데 감속 페달(브레이크)과 가속 페달(액셀러레이터)을 오인할 가능성이 작지 않겠느냐고 관측했다. 하지만 사고 이후 스스로 차량이 멈춰 서는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며 "급발진 차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며 오작동 의혹에 힘을 실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2013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급발진 사고 40건 중 약 80%가 운전자의 오조작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개 운전자가 감속 페달을 밟아야 할 상황에서 가속 페달을 밟는 경우다. 문제는 운전자의 증언만으로 급발진의 원인이 운전자의 판단 오류로 인한 페달 오조작인지, 차체의 기계적 결함인지 여부를 규명하기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김한용의 모카채널 유튜브에 급발진을 주장한 한 택시 기사의 페달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돼 시선을 끌었다.

김한용 씨가 4일 올린 영상에 따르면 이 영상은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택시 운전자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올린 PPT자료며 급발진 주장 차량의 페달 영상이 공개된 것은 세계 최초라 한다.

이 사고 택시 기사는 지난해 용산구 이태원서 전기차가 담벼락에 돌진했다는 기사의 주인공이다. 당시 급발진 이슈가 한창 뜨거워지는 단초가 됐다.

만 65세의 아이오닉6 택시 운전자 B씨는 급발진이 우려돼 차량에 360도 블랙박스를 장착하면서 페달을 비춰주는 급발진 블랙박스도 설치했다.

B씨는 사고 후 "갑자기 언덕에서 차가 안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브레이크 밟으니 차가 확 나가고 브레이크 페달 여러 번 밟아도 먹통이었다"며 급발진을 확신했다.



이후 경찰이 블랙박스 영상을 가져가서 운전자와 함께 봤다.

담긴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B씨가 감속해야겠다는 생각에 연속해서 밟은 것은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이었던 것. 그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내가 못 밟더라"라며 3인칭시점으로 얘기했다.

김한용 씨는 페달 블랙박스를 장착한 분 중 이 영상을 확인하는 방법을 모르다가 나중에 사고가 난 후 이를 설치업체에 와서 확인한 후 "내가 밟은 게 브레이크가 아니었네"라고 말하고 돌아가시는 분도 많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한용 씨는 "차가 튀어 나갔는데 노련한 사람(운전자)이 어떻게 (페달을) 옮겨 밟지 못할까 (생각할 수 있다). 흔히 생각할 때 (페달을) 밟았다가 튀어 나가면 ‘어? 아니었구나’하고 옮겨 밟을 걸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일단 가속페달을 밟고 차가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가고 당황하게 되면 노련한 택시 운전사도 절대 이 페달에서 발을 쉽게 뗄 수가 없다. 이미 자기가 머릿속에서 급발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급발진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 사람에겐 차가 튀어 나갔을 때 '급발진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한 상황에서 무서운 급발진을 막는 방법이라곤 지금 밟고 있는 페달을 더 밟는 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B 씨 또한 우회전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며 액셀 페달을 밟은 후 차량이 튀어 나가자 약 0.5초 간격으로 액셀 페달을 계속 밟고는 마지막에는 힘주어 액셀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이 분석 자료는 지난 2월 유럽연합유엔경제위원회(UNECE) 주관 분과 회의에 참석한 한국교통안전공단에 의해 공개됐다가 뒤늦게 알려졌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은 페달 오용 사고 영상 분석을 통해 주행 상황 및 가속 페달 조작 패턴 파악하기 위해 발표를 진행했다.

최근 급발진 의심 관련 사고가 급증하는 만큼 운전자들은 차량 급발진 시 대처요령을 숙지하는 것이 좋다.

예상치 못한 가속이 발생했을 때 운전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는 주행 중 급발진이 발생하면 바로 시동을 끄기보다 차량 기어를 중립(N) 상태로 바꿔놓는 것을 추천한다.

공단은 지난해 진행된 '의도하지 않은 가속' 시연에서 국내 판매 차량을 대상으로 주행 및 제동실험을 실시했다. 시동을 끄기까지 최대 5초 시동 버튼을 누르거나 최대 5회 이상 반복적으로 눌러야 하는 등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변속기어를 중립으로 변경하는 방법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급가속 현상이 일어나면 당황하지 말고 '모든 페달'에서 발을 떼어 보라고 말한다. 운전자가 페달을 착각해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을 밟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양발이 모두 페달을 밟고 있지 않은데도 속도가 올라간다면 급발진을 의심할 수 있다.

이 경우 브레이크를 여러 차례 나눠 밟지 말고 두 발로 한 번에 세게 밟아야 한다. 브레이크에는 진공 배력 장치가 사용돼 적은 힘으로도 차를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급발진 상황에서는 압력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충돌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수직 구조물 대신 앞차(트럭 제외) 트렁크를 박거나 가드레일 측면으로 붙어 속도를 줄여야 한다.

전봇대나 건물 등 수직 구조물은 충격이 커 다칠 위험이 높기 때문에 앞차 트렁크를 박는 게 낫다. 트럭은 차량이 아래로 깔려 들어갈 수 있어 피해야 한다.

사이드브레이크는 속도가 확실히 떨어지고 난 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사이드브레이크를 채우면 뒷바퀴의 접지력을 잃어 차량 제어가 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조만간 차량 전체에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설치를 의무화할 전망이다.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교통부는 이르면 2025년 6월부터 모든 신차에 페달 오조작 급발진 억제 장치(PMPD·Pedal Misapplication Prevention Device)를 설치하도록 할 예정이다. 일본 고령화율이 나날이 심화하며 고령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에 의한 사고가 빈번해진다는 위기감에 따른 조치라는 분석이다.

PMPD는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잘못 밟았을 때 엔진 출력을 자동으로 줄여 급발진을 방지하는 장치다. 차량의 앞면과 뒷면에 차량 주변 장애물을 감지하는 센서와 카메라를 설치해, 장애물이 있는 환경에서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을 때 연료를 자동으로 차단한다. 이를 통해 차량의 갑작스러운 가속을 막는 원리다.

유엔유럽경제위원회(UNECE)도 지난달 차량에 페달 오작동 방지 장치를 설치하도록 하는 안을 골자로 한 국제 규제 조항을 채택기로 했다. UNECE는 "2050년까지 65세 이상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하는데, 페달 오작동과 고령 인구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사고 위험이 나날이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내년 6월 UN 규제 조항이 발효되면, 일본이 제안한 PMPD가 차량 안전장치의 국제표준으로 승인될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도심서 9명이 사망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검토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