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일탈한 '성악 엘리트'…다시 정통 성악으로 박수 받다

입력 2024-07-01 18:08
수정 2024-07-02 00:23
베이스바리톤 길병민(30·사진)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는 서울대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찍이 유수의 글로벌 콩쿠르를 석권했다.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정통 성악가로서 성공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돌연 성공 가도에서 이탈하며 모험을 떠났다. 2020년 크로스오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전한 이후 뮤지컬, 트로트를 넘나들며 활동 영역을 넓혔고 다달이 성악 리사이틀도 열었다.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에서 열린 그의 리사이틀 ‘로드 오브 클래식(THE ROAD OF CLASSICS)’은 쉼 없이 달려온 그간의 행보를 잠시 마무리 짓는 자리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공연 1부에서 성악가로 거듭나기 위해 연마한 아카데믹한 곡을, 2부에서는 상아탑 바깥에서 이뤄진 자신의 모험을 빗댄 곡과 팬들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답가로서의 음악을 골고루 들려줬다. 타고난 성량으로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곡들을 특유의 악센트까지 소화하며 천재 성악가의 기량을 보여줬다.

1부 포문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의 일부인 ‘무기를 들라, 그대 용사들이여’로 열었다. 이어 슈베르트의 ‘지옥에서 온 무리들’, 볼프의 ‘가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등을 베이스바리톤의 묵직한 중저음으로 표현해냈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들 가곡은 낮은 음역대에서 노랫말의 의미를 전달해야 빛이 나는 터라 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1부 후반부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앞선 곡들과 달리 테너에 비견될 만큼의 높아진 음역으로 풍부해진 낭만적 감성을 분출해냈다.

2부에서는 분위기를 전환해 돈키호테와 관련한 두 곡을 불렀다. 이베르의 ‘죽음에 대한 노래’와 마스네의 오페라 ‘돈키호테’ 중 ‘웃어라, 웃어. 이 불쌍한 이상주의자에게’가 그것이다. 후회 없이 도전하고, 남과는 다른 길을 개척해온 모험가를 빗댄 노랫말이 본인의 여정과도 겹쳐지는 선곡이었다. 노쇠한 돈키호테와 호방한 돈키호테를 오가며 무대를 꽉 채운 그에게 차세대 오페라 가수로서의 모습이 기대됐다.

이후 이어진 노래 중에서 그리그의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리스트의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클라이맥스마다 관객의 눈시울이 붉혔다. 클래식 바깥으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엘리트 성악가의 길을 떠나려는 듯한 그에게 따뜻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