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경찰서 소속 한 지구대 112 상황실로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긴급 출동한 경찰은 이 실종자를 단 45분만에 찾아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지난 26일 열린 ‘ETRI 컨퍼런스 2024’에서 선보인 ‘긴급 구조용 지능형 정밀 측위(위치 측정) 기술’의 실제 현장 적용 사례다. 이 기술 개발로 기존에 평균 30시간 이상 걸리던 실종자 수색 기간이 대폭 단축됐다. ETRI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이 기술을 개발해 경찰청과 함께 실증하고 있다.
이 기술은 3차원 복합 위치 측정으로 실종자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비결은 스마트폰 내 기압계와 이동형 와이파이 시스템이다. 방승찬 ETRI 원장은 “기상청에서 매일 측정해 공표하는 기저 기압과 실종자 스마트폰이 위치한 곳 기압 차를 분석하면 실종자 위치가 수직 3m 범위로 특정된다”며 “심플한 아이디어로 융합 기술을 개발해 과학 치안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실종 또는 감금된 사람의 위치를 수직으로 특정할 수 있는 기술은 전혀 없었다.
실종자의 가로 위치는 휴대용 와이파이로 특정한다. 경찰이 휴대용 와이파이 송신기로 실종자 휴대폰 내 비밀 수신기 전원을 켜서 위치를 특정하는 방식이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신호 강도가 증폭되는 점을 이용한다. 이날 행사장에선 와이파이 송신기를 든 경찰관 대역이 수신기를 든 실종자 대역에 가까이 다가가자 ‘초근접’ 경보가 울리는 시연이 이뤄졌다.
경찰청은 이 와이파이 송신기를 2022년 9월 서울 도봉경찰서에 처음 도입했다. 그간 경북 구미, 충남 서천 등 전국 7개 경찰서로 확대 적용해 실제로 66건의 인명 구조 성과를 냈다. 올해 안에 서울 관내 31개 경찰서 전역으로 실증을 확대할 예정이다. 경찰청은 이번 ETRI 컨퍼런스 2024에서 동반협력상을 받았다.
‘디지털 혁신으로 만드는 행복한 내일:인공지능과 동행’을 주제로 서울 역삼동 과학기술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번 ETRI 컨퍼런스는 AI 융합 기술이 주로 소개됐다. 방 원장은 긴급 구조용 정밀 측위 기술 외에도 실시간 스트리밍 종단형 음성인식 기술, 자율성장 AI ‘가이아’, 혼합현실 대테러 훈련 기술을 직접 시연했다.
기존 트랜스포머를 변형시켜서 성능을 높인 실시간 스트리밍 종단형 음성인식 기술은 국회 의사중계시스템, 명동역 등 서울 11개 지하철역사 13개국 언어 자동통역 서비스에 적용됐다. 역무원이 외국 승객을 응대할 때 쓰는 이 서비스에 대부분 외국인들이 큰 만족감을 보였다.
가이아는 학습용 데이터가 없어도 스스로 성장하는 ‘제로샷 러닝’ 기법으로 만들어진 멀티모달 AI다. “유치원 학예회에 가는 데 어울릴 단정한 상의를 추천해 줘”라고 입력하자 화이트 블라우스를 추천했다. 이 블라우스에 어울리는 가방도 척척 제시했다.
혼합현실 기반 대테러 훈련 기술은 다중 밀집 지역에서 테러범, 일반인 등을 디지털 휴먼으로 구현해 군과 경찰이 실제와 유사한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게 만든 메타버스 프로그램이다.
ETRI는 차세대 AI반도체인 PIM(프로세스인메모리)을 탑재한 8테라플롭스(TFlops: 1초에 1조번 연산) 속도의 초고성능컴퓨팅(HPC)용 프로세서를 연말까지 선보일 계획이다. 100Gbps급 무선 전송 기술과 빔포밍 등 차세대 통신(NEXT G) 요소 기술 개발도 지난달 완료했다. 비침습적 방식으로 혈당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방 원장은 “초고성능컴퓨팅(HPC), 초연결 인프라, 초실감 서비스로 국가 혁신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 ETRI의 사명”이라며 “지능형 로봇 등 ICT(정보통신기술) 기반 융합 서비스로 다양한 공공,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참석해 ETRI와 개인적 인연을 언급하며 눈길을 끌었다. 안 의원은 “10여 년 전 대전 유성구 원촌동에서 살 때 ETRI에서 강의를 몇번 하면서 넥타이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걸 차고 왔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환호가 터졌다. 안 의원은 이날 AI 딥러닝에 활용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발굴을 강조했다.
안 의원은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고 나서 드라마 대장금이 나왔는데, 승정원일기는 아직 10%밖에 번역이 안 됐다고 한다”며 “딥러닝에 쓸 수 있는 데이터로서 우리 고유의 콘텐츠가 엄청난 만큼 인문학 투자를 더 많이 해서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해성 기자
한국경제·ETRI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