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구호 ‘마가(MAGA)’는 역설적으로 미국이 더는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의 저자인 중세사학자 피터 헤더와 정치경제학자 존 래플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예전의 방식으로는 다시 위대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예전의 방식,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까지 서구 중심의 ‘경제 제국주의’가 붕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와 현대사를 비교하면서 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톺아 나간다. 로마제국 역사서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에 나온 일부 주장을 반박하고, 현대 서구의 정치경제사와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정교하게 비교한다.
기번은 로마제국이 천천히 멸망해나갔다고 주장했다. 2세기 황금기부터 5세기 몰락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느리고 긴 쇠퇴를 겪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오히려 로마가 망하기 직전에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했다고 반박한다. 로마의 경제 총생산량은 멸망 직전인 4세기에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에 섬뜩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들 국가는 자유무역, 국제 금융 시스템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에 사실상의 경제 제국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다 21세기 들어 그 지배력이 빠르게 무너지는 추세다. 1999년 80%에 육박했던 서구의 세계 총생산량(GGP) 비중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10년 만에 60%까지 감소했다. 정점을 찍었다가 금세 멸망한 로마제국처럼 제국의 위치에서 번성해 온 서구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실제로 로마제국과 서구의 경제 구조는 닮은 점이 많다. 모두 주변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이용하며 번영해왔다. 식민지 혹은 제3세계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들과의 불균형한 거래를 통해 부를 쌓았다. 로마는 육상 운송을 통해, 서구는 항로와 철도망 등으로 촘촘한 무역망을 구축해 주변국으로부터 값싼 노동력과 자원 등을 수혈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을 키운 주변부가 제국의 중심을 위협하는 과정도 로마와 현재 서구 국가들이 공통으로 겪는 현상이다. 서로마제국은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부상한 반달족, 고트족, 알란족, 프랑크족, 부르고뉴족 등 야만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겪으며 점차 멸망으로 향해 갔다. 중국이란 초강대국 경쟁자의 등장으로 변화를 맞닥뜨린 미국도 로마와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다.
저자들은 이민자가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로마제국 쇠망사>의 기번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250여 년 전 기번은 기독교를 비롯한 외부 세력 유입이 로마에 분열을 일으켜 쇠락의 씨앗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등 일부 서구 지도자가 높은 이민자 장벽을 세우는 데 역사적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현대의 이민은 오히려 서구에 경제적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공백이 생긴 노동력과 공공서비스를 이민자들이 지탱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서구 복지 국가를 지탱하는 의료 분야도 외국에서 훈련받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의존한 덕분에 공공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헤더와 래플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다시 위대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세계 정치와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가 변화했기에 과거 20세기의 질서로 복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란 지적이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현대 서구 제국이 과거의 강압과 착취에 조금이라도 반성한다면 누구든 제국의 종말을 애도해선 안 된다”며 서구 중심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덧붙인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