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달러당 160엔대로 고꾸라지며 약 38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슈퍼 엔저’ 현상에 아시아 통화 가치와 증시도 일제히 내렸다. 일본 외환당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매각해 환율 방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미 국채 금리까지 뛰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85조원 투입에도 엔화 약세
뉴욕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26일(현지시간) 장중 한때 160.85엔까지 오르며(엔화 약세) 1986년 12월 이후 장중 최고 기록을 썼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160엔을 넘어선 건 지난 4월 29일 160.03엔을 기록한 후 두 달 만이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며 아시아 통화 가치도 19개월 만에 최저 기록을 세웠다.
27일 블룸버그 아시아달러인덱스는 89.98로 2022년 11월 3일(89.09) 후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아시아 주요 증시도 동반 하락했다. 닛케이225지수는 오후 3시 기준 1% 가까이 하락했고, 홍콩 항셍지수와 상하이종합지수도 각각 약 2%, 0.6%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환율 방어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달러당 160엔대로 떨어지자 일본 외환당국은 구두개입에 나섰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기자들과 만나 “긴장감을 갖고 (엔저) 움직임을 분석하겠다”며 “필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달러당 엔화가 160엔을 넘기자 환율 개입에 나섰지만 일시적인 효과를 보는 데 그쳤다. 일본 정부는 4월 26일부터 5월 29일까지 환율 방어를 위해 9조7885억엔(약 85조원)을 투입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개입 효과는 불과 2개월 만에 사라졌다”며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면 그사이 미·일 금리 차가 개선되고 달러 매수세가 약화할 수 있다는 일본 정부의 예상이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엔·달러 환율이 170엔을 뚫을 가능성도 거론한다. 시바타 히데키 도카이도쿄인텔리전스라보 수석전략가는 “일본 기업의 달러 수요도 견고하다”며 “다음주 165엔, 3개월 뒤에는 170~175엔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美 국채 매각, 금리 인상 등 거론엔화 약세는 미국 국채 금리도 끌어올렸다. 26일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24%에서 연 4.316%로 0.076%포인트 올랐다. CNBC는 “일본이 외환시장 개입을 위해 미 국채를 매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미국 국채 수익률이 올라갔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4월 말 기준 1조1500억달러(약 1600조원)를 보유해 2위인 중국(7710억달러)을 4000억달러가량 웃돈다.
일각에서는 일본은행이 엔화 가치 방어를 위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일본은행은 올 3월 단기 기준금리를 연 -0.1%에서 연 0~0.1%로 인상하며 2016년 1월 이후 유지해 온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기했다. 하지만 연 5.25~5.5%인 미국 기준금리와는 여전히 격차가 크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추가로 인상하면 약 20조달러로 추산되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거 청산될 가능성이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저금리인 엔화를 빌려 고수익이 기대되는 자산에 넣는 투자 기법을 말한다. 다만 당분간 일본 정부가 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나온다.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데다 장기 금리가 오르면 일본 정부의 국채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일본 재무성은 2027년에 국채 이자 지급비로 올해보다 약 60% 늘어난 15조3000억엔(약 138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6월 금융정책결정회의 이후 일본은행이 금리 인상에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견해는 소수”라고 보도했다.
김세민 기자 unija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