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연극배우이자 연출의 대부 고(故) 이해랑 선생의 손녀. 말의 눈빛과 털끝까지 표현한 한국 극사실주의 대표 화백 이석주의 딸.
이사라 작가(45)의 그림을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이런 수식어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겠다. 그의 ‘원더랜드’ 시리즈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소녀를 팝아트 형식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메소드 연기에 가까운 리얼리즘을 추구한 조부의 ‘햄릿’이나, 말갈기가 휘날리는 장면까지 정밀하게 묘사한 부친의 그림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다.
3대(代)에 걸친 예술가의 DNA는 어디로 갔을까. 지난 26일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막을 내린 그의 개인전 전시장을 찾아가 물었다.
“조부, 부친과 완전히 다른 예술을 추구하는 이유는 뭔가요?”
곱게 빗어 넘긴 노란 머리카락과 순진무구한 미소, 별을 삼킨 듯 맑게 빛나는 눈동자. 이사라가 그린 소녀를 보면 TV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몽환적인 파스텔톤 색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어렴풋한 동심을 소환한다. 이 작가는 말했다.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그 안에 담긴 철학은 비슷해요.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는 성실한 태도는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원더랜드는 작가가 창조한 미지의 세계다.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 등 히어로들이 모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작가는 최근 원더랜드 세계관을 풀어서 설명한 소설 <What Happened in the Wonderland>(헤르몬하우스)를 펴내기도 했다.
원더랜드에는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규칙(Rule 6)이 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할 것,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 것, 열심히 일할 것, 나를 아름답게 가꿀 것,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 그리고 완전한 행복을 꿈꿀 것.
유토피아 같던 이곳에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Rule 6’를 어기며 알록달록하던 세계가 무채색 황무지로 변한 것이다. 원인을 찾아내야만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현실을 살아가던 작가는 작품에 그려진 소녀의 눈동자에 빠져들며 원더랜드 속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림의 소녀처럼 행복만 가득했던 건 아니다. 작품 자체보다 ‘이해랑의 손녀’ ‘이석주의 딸’이란 꼬리표가 앞서는 게 작가로서 커다란 벽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부친을 따라 사실주의 기법을 꽤 오래 연마하던 그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 나섰다. 2000년대 ‘드림’ 시리즈부터 최근의 원더랜드까지 독특한 화풍이 형성된 배경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빼닮은 점이라면 예술가로서 극도의 집중력과 끈기다. 이해랑 선생은 1989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연극 열정을 불태웠다. 며칠 후 개막할 ‘햄릿’의 연출을 맡아 연습실로 향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다. 이석주 화백의 극사실주의 회화도 고도의 집중력으로 사진을 방불케 하는 작업들이다.
이사라는 매일 16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목공소에서 합판을 고르고, 흰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백그라운드 작업부터가 시작이다. 물감이 마르면 조각칼을 들고 작품 곳곳에 미세한 패턴을 새긴다. 무광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수십 번 사포질을 한다. 솜사탕 같은 포근한 감성을 더하고자 마카롱 한 조각을 입에 넣는 것도 빠지지 않는 루틴이라고.
“할아버지는 예술가로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죠. ‘여자도 당당히 일해야 한다’ ‘예술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아버지한테는 성실함을 배웠죠. 매일 아침 캔버스 앞에 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는데, 어느새 제가 그 모습을 따라 하고 있네요.”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