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26일 18:3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벌레 한 마리가 우물 물을 흐린다.”
1997년 어느 날. 당시 삼성전자 살림살이를 맡고 있던 최도석 경영지원실 전무는 한 정부 인사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외환위기로 자금난을 겪던 삼성전자는 당시에 1조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타진했다. 하지만 정부는 삼성전자를 '벌레'로 취급할 만큼 무시했다고 한다. 2005년 5월 당시 최도석 삼성카드 부회장은 성균관대 최고경영자 특강에서 이 같은 비화를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강연에서 “외환위기 때 은행에 자금을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해 울면서 나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 수모를 겪은 뒤 ‘다시는 은행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 직후에 삼성전자는 '무차입 경영'을 이어갔다. 여러 전략적 배경도 깔려있지만, 외환위기 때 겪은 수모도 무차입 경영의 배경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은행·자본시장과 거리를 뒀던 삼성전자의 재무전략이 요즘 변화할 조짐이 포착된다.
27일 산업은행에 따르면 이 은행은 반도체 산업에 국고채 금리 수준의 저금리 대출을 할 수 있도록 17조원 규모의 반도체 설비투자 특별 프로그램을 신설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도 관련한 대출에 관심을 가지고 조건 등을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출을 받을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대출과 함께 자본시장에서도 삼성전자가 등장했다. 최근 삼성전자 자금조달 작업을 총괄하는 조직인 재경팀 임직원들이 국내외 증권사 관계자와 만나 회사채와 글로벌본드(외화 조달을 위해 해외에서 발행하는 채권) 발행 여건을 점검했다.
삼성전자는 2001년 10월에 국내 회사채 시장에서 5000억원을 조달한 바 있다. 이 회사는 그 직후 23년 동안 한국 시장에서 회사채를 찍지 않았다. 2012년 4월에 삼성전자 미국법인이 5년 만기로 글로벌본드 10억달러를 발행한 바 있다. 그 뒤로는 자본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삼성전자도 어려운 시절이 많았다. 외환위기가 엄습한 1997년 말 삼성전자의 부채비율은 300%에 달했다. 당시 정부가 구조조정 대상 기준으로 설정한 '부채비율 200%'를 큰 폭 웃돈다. 1997년 말 차입금은 12조원에 육박했고, 이 가운데 만기가 1년 이하인 단기차입금은 1조3119억원에 달했다. 당시 현금이 1조3000억원가량 있었지만, 운영비용 등을 조달하기가 빠듯했다. 외환위기 상황인 만큼 자금 차환에 어려움을 겪는 등 자금난에 봉착했다.
그나마 1997년 10월에 골드만삭스를 주관사로 양키본드 1억달러를 발행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삼성전자의 양키본드는 미국 국적이 아닌 회사가 미국 시장에서 발행하는 달러표시채권이다. 만기는 30년이고, 금리는 연 7.7%에 달했다. 당시 한보와 진로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맞으면서 한국 기업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상황에서도 조달에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조달한 달러는 삼성전자가 외환위기를 견디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는 27년째 이 양키본드 이자비용과 원금을 갚는 중이다. 연 7%대 고금리 채권을 갚지 않는 이유는 관련한 권한이 없어서다. 양키본드를 조기 상환할 권리(콜옵션)가 없는 만큼 만기 시점인 2027년까지 이 채권을 상환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자본시장과 긴 시간 동안 평행선을 이어갔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바꼈다 지적이 나온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는 만큼 투자금 조달 유인이 커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유한 현금성 자산도 빠르게 소진되는 중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에 보유한 현금성자산(현금, 단기금융상품 등 합계)이 140조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50조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이어간 데다 반도체 업황이 나빠지면서 실적이 저조해지면서 현재 보유 현금은 90조원 수준으로 줄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