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유럽은 '제국'이 될 수 있을까

입력 2024-06-21 18:07
수정 2024-06-22 00:56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유럽에서는 의회 선거가 열렸다. 유럽의회는 유럽연합(EU)의 입법부에 해당한다. 5년 임기의 새 의회 시작을 앞두고 서로 다른 성향의 정치 그룹이 물밑에서 치열한 이합집산을 벌이고 있다.

이번 선거의 특징을 ‘극우파의 약진’으로 묘사한 보도가 적지 않다. ‘극우’라는 표현이 적절한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반(反)이민을 내걸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자극하는 ‘우클릭’ 경향이 강해졌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이들은 EU의 ‘지배’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 이후 서방세계는 꾸준히 지리적으로 그 영토를 넓혀 왔다. EU 가입 국가는 현재 27개국에 이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국가도 32개국으로 늘어났다. 자유주의는 순조롭게 전 세계로 확산되는 듯 보였다. (지금은 없어진) ‘한·EU 언론 교류’ 프로그램 덕분에 200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잠시 머물 기회가 있었다. 금융위기 직후였지만 유럽 각국을 강타한 재정위기가 닥치기 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EU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포용적이었으며, “공짜로 방송용 스튜디오를 빌려줄 테니 EU에 관한 무엇이든 제작해서 세상에 알리라”고 각국의 기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후 EU의 행보는 실망스럽다. 추가 회원국 가입 신청을 거절해 가며 시간을 보내다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한 사건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자신감을 크게 키워줬다. 2015년께부터는 난민이 급증하면서 EU 회원국 간 균열이 커졌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EU가 꿈꿨고 지금도 꿈꾸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의 제국’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등이 벌인 식민지 쟁탈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제국이라는 표현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한국도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국가 단위를 넘어 초국가적인 틀에서 공동의 규칙과 권위를 따르는 정치적 단일체는 제국의 성격을 갖는다.

티머시 가튼 애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유럽이 ‘제국주의 이후의 제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타국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제국은 아니더라도 제국다운 면모를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EU가 보다 중앙집중적인 권력을 갖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회원국 한 곳만 반대하면 일이 틀어지는 식으로는 힘 빠진 종이호랑이와 다름없다는 얘기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거듭해 EU와 NATO의 외연 확대를 외치는 것은 확장하지 않는 EU, 제국적이지 않은 EU는 무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당들의 약진은 EU의 원심력을 한층 가속화할 것이다. EU를 제국답게 만들자는 주장은 그 반대의 구심력을 확보하기 위한 절박한 발언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유럽 경제가 도무지 살아날 기미가 없다. 미국이 빅테크를 중심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럽이 27개국 간 단일 시장을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미국에 ‘아이디어 시장’ 노릇밖에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유럽의 좋은 아이디어, 좋은 인재는 모두 미국에 빼앗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는 ‘유럽산 구매운동(Buy European)’ 식의 보호주의적 정책을 일정 부분 써서라도 생산성 향상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만들어 온 자유주의 질서는 빠르게 격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어떤 식으로든 축소된다면, 유럽은 역사적인 분기점에 서게 된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결정하고 미국과 회원국을 다독여 이 전쟁을 이끌어 갈 구심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서방’이라는 개념도 본격적으로 도전받을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이 손을 잡는 지금 한국의 미래도 위태로워지고 있다.

영국 교육장관을 지낸 H A L 피셔는 1936년 <유럽의 역사>에서 “유럽 국가들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잘 결합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느냐는 문제는 세계의 미래에 관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적었다. 2024년에도 유효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