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쌓아둘 필요 없이 밸류업에 전념"…포이즌필 반기는 기업

입력 2024-06-13 18:25
수정 2024-06-14 02:23
일본 3위 정유회사인 코스모에너지홀딩스는 2023년 일본 행동주의 펀드 시티인덱스일레븐스의 공격을 받았다. 코스모에너지 지분 20%를 보유한 시티인덱스는 경영진에게 신재생에너지 사업 분할 매각과 정유소 통합 등을 요구했다. 코스모에너지는 ‘포이즌필’(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을 꺼내 들어 이 펀드의 공세를 막았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 정책은 일본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경영권 방어 제도는 일본 밸류업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기업이 주주·기업가치 향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정부가 15년 만에 경영권 방어 제도 논의를 재점화한 데도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 ○거세진 행동주의 공세
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 한국경제인협회는 금융감독원 후원으로 오는 26일 열리는 기업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서 기업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사례와 영향을 살필 전망이다.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을 이사회 결의만으로 도입할 수 있는 미국의 사례 등도 소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번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과 각계 반응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상법 개정안의 윤곽을 잡을 계획이다.

이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가 거세진 것과 맞물린다. 한경협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지난해 77개사로 집계됐다. 조사 대상 23개국 가운데 미국 550개사, 일본 103개사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지난해 공격 대상이 된 한국 기업 수는 전년에 비해 57%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북미가 9.6% 증가하고, 유럽이 7.4% 감소한 것과 비교해 큰 폭으로 불어났다.

국내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장치를 확보하지 못한 점이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를 불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7개국(G7)은 포이즌필을 비롯한 경영권 방어 제도를 1개 이상 도입, 운영 중이다. 주요국 가운데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자사주 소각’ 등 밸류업 유인 커져정부가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논의를 재개한 것은 15년 만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포이즌필을 허용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야권의 반대로 무산됐다.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논의가 모처럼 나온 것은 밸류업 정책과도 맞물려 있다. 제도 도입으로 기업의 자사주 소각을 비롯한 주주친화책을 유도할 수 있어서다. 자사주는 그동안 상장사 대주주들이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자사주는 의결권과 배당권이 없지만 백기사(우호 주주)에게 넘기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 같은 자사주 활용이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업들이 보유한 자사주의 장부가치만큼 자기자본에서 차감하는 방식으로 회계처리하고 있어서다. 일반 주주들이 상장사에 자사주 소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이유다. 경영권 방어수단이 생기면 자사주 소각을 비롯한 주주가치 환원 유인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김수연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은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하고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경영권 방어 제도 등의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