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 누가 기억해줄까"…명동거리서 박수근은 되뇌었다

입력 2024-06-13 18:01
수정 2024-06-14 02:37

서울 창신동에서 박수근은 화강암 질감으로 마티에르를 구성하는 ‘미석 화법’을 창안했다. 그리고 휴머니티가 흠뻑 밴 서민들의 생활상을 자신의 주요 화제로 완성했다. 이렇게 그의 예술 꽃이 활짝 피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곳이 명동이다. 이 때문에 명동을 떠나 화가 박수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자리)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1층 로비에 있던 반도화랑은 그의 예술을 파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다.


일제강점기 금융과 유통의 중심지, 지금의 명동인 명치정(明治町)은 메이지(明治) 일왕의 이름을 붙인 곳이다. 즉 경성의 긴자였고, 월스트리트였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광장(선은광장)을 전차가 지나갈 때 미쓰코시백화점 위로 보이는 조선신궁을 향해 전차 차장은 ‘미나산 모쿠토 구다사이’(모두 일어나 목례해주세요) 하며 참배를 강요했다.


1935년 우리 문단사에서 이단아로 불리는 시인 이상도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 서 있었다. 그가 쓴 1인칭 시점 소설 ‘날개’에서다. 이상이 날려고 한 미쓰코시백화점, ‘아래층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 한국물산점 초상화부에서 화가 박수근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건물 이름이 바뀌었다. 미8군 PX다. 이곳에서 그린 그림에는 우리나라 서민의 모습이 안 보인다. 다 하나같이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코쟁이들이다.

남의 나라 이념 전쟁에 동원된 미군들, 그들은 짬을 내 가족과 애인에게 줄 선물을 사러 이곳에 들렀다. 전쟁통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의 모습을 스카프와 손수건에 남기려 했다. 아마도 그 스카프나 손수건이 자신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여러 환쟁이가 묵묵히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극장 간판이나 이발소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다.

지나가는 미군을 열심히 불러 모으는 속칭 ‘삐끼’가 있었다. 앳된 처녀 박완서. 박수근은 자신을 다른 환쟁이처럼 취급하지 말라며 아무 말 없이 자기가 입선한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을 박완서에게 건네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1970년 출간된 박완서의 ‘나목’에 ‘옥희도’와 ‘이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림을 빨리 그리라고 닦달하고, 사진과 닮게 그리라고 갈구던 박완서. 과묵한 화가 박수근. 소설 속 두 사람은 일이 끝나고 명동 거리를 활보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나중에 박완서는 소설이 실화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실화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후일 한국 최고의 소설가와 국민 화가로 등극한 두 사람이 젊은 시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누비는 스토리.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길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다리며 그 옆을 서성댈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깨닫는다.”(‘나목’ 중)


명동에는 박수근의 체취가 많이도 묻어 있다. 반도호텔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9층 건물이었다. 1936년에 지어진 호텔의 주인은 일본 재계 서열 10위인 ‘사업왕’ 노구치 시타가우(1873~1944)다. 수풍수력발전소를 건립하고 함흥에서 기반을 닦아 돈을 벌었다. 조선 최고의 호텔 ‘조선호텔’에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서 ‘당신 같은 사람은 이런 호텔에 들어올 수 없다’는 냉대를 받았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반도호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반도호텔은 6·25전쟁 후 초토화됐지만 복구를 해 외국인 전용 호텔로 쓰였다. 1956년 호텔 커피숍 한쪽에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협조로 반도호텔 상설 미술 전시장이 열리고, 이를 아시아재단이 인계해 1958년 반도화랑이 개설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화랑이다. 10호 미만 동서양화를 30~40점 걸 수 있는 공간이지만 박수근에게는 유일한 그림 판매처이자 가족에게는 생계의 근원이었다.

박수근은 오후 4시쯤이면 창신동에서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왔다. 화랑에서 자신의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 확인하고, 국내에서 드물게 양변기가 설치된 이곳에서 볼일을 봤으며, 저녁에는 명동에서 만난 예술인과 한잔한 뒤 헤어지기도 했다. 황금찬 시인은 ‘문단사’에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영문도 없이 하는 것이다. ‘황 선생, 내가 죽고 나면 내 그림이 어떻게 될까? 단 한 점이라도 누가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어느 날의 낙엽같이 그렇게 쓸려가고 말까?’ 하는 것이었다.”

호텔에 묵은 사람들이 구입한 박수근 작품은 수십 년이 흘러 국내로 돌아왔다. 작품 뒷면에는 반도화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 문정관 부인인 마리아 헨더슨은 서울아트소사이어티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 번 화가 작업실을 방문하는 행사를 열곤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한 조소 예술가였다.

또 한 명의 애호가인 실리아 지머먼은 미국 코넬브러더스상사 서울영업소 공리양행 책임자인 조지프 지머먼의 부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화상이기도 한데, 그녀도 반도호텔 상설 전시장 설립과 운영에 적극 가담했다. 그녀는 박수근의 ‘노변의 행상’을 구입해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서 개최한 ‘아시아와 서양의 미술’ 전시에 출품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이론에 따라 백화점 옥상에 카페를 차린 모습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시작해 신세계백화점으로 바뀐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박수근은 PX로 변한 이 건물에서 가족과 생계를 위해 우직하게 그림을 그렸다. 화가 박수근은 죽으면서 무슨 말을 남겼을까. 간경화와 백내장으로 실명한 박수근은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너무 멀어….” 하면서 1965년 5월 6일 타계했다. (아르떼 홈페이지 arte.co.kr에서 연재 계속.)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