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파산하는 지역주택조합이 줄을 잇고 있다. 고금리로 인해 금융 비용이 크게 오른 데다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 조달까지 어려워지면서 비교적 사업성이 우수한 서울에서도 파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지역주택조합이 파산할 경우 내 집 마련은커녕 조합에 납부한 분담금마저 돌려받지 못할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법원서 회생신청도 '기각'1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회생법원 18부는 지난 10일 '행운동 더퍼스트힐(옛 서울대역편백숲2차) 지역주택조합 설립추진위원회'에 대해 파산선고를 했다. 채권 신고는 다음달 1일까지 받고, 채권자집회 및 채권조사 기일은 다음달 26일로 정했다. 재판부는 "채무자에게는 지급불능 및 부채 초과의 파산원인 사실이 존재하므로 관련 법을 적용해 파산을 선고하기로 한다"고 판시했다.
행운동 더퍼스트힐 지역주택조합 추진위는 서울시 봉천동 66 일원에 총 1042가구 규모의 아파트 건립을 추진했다. 2008년 봉천동에 처음 사무실을 열었고 2019년 11월 창립총회를 거쳐 본격적으로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추진위는 사업지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과 인접한 점 등을 내세워 사업성을 홍보했다.
하지만 토지사용권한 확보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등 사업이 오랜 기간 지연됐고,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 상당수가 가입계약을 해지해 분담금을 반환받기도 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추진위를 상대로 부당이득금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입자들의 분담금 납부마저 지연됐고 이에 추진위의 재정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추진위는 작년 11월 서울회생법원에 회생절차 개시 신청을 했다. 법원의 개시 전 조사 결과 추진위의 자산 총계는 약 532억원인 반면 부채 총계는 약 761억원에 달했다. 이에 재판부는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를 초과함이 명백해 회생보다는 파산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채권자 이익에 부합한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고, 이날 파산선고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년 서울에서만 4곳 파산지역주택조합의 파산은 최근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 5년간의 법원 파산 사건 공고를 전수조사한 결과, 전국 지역주택조합 파산은 2020년 1건, 2021년 1건, 2022년 0건에서 지난해 6건으로 급증했다. 이 가운데 4건은 상도장승배기 지역주택조합, 서울대역관악파크1차 지역주택조합설립 추진위원회 등 서울에서 나왔다.
또 지난해 파산선고를 받은 지역주택조합 가운데 3곳은 추진위 단계가 아닌 조합이 설립된 곳이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토지 사용 면적의 80% 이상의 사용 동의서를 확보해야 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 이미 사업 추진이 어느 정도 진척된 곳에서도 파산 선고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역주택조합 파산의 원인으로는 고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상승과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거절 등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점이 꼽힌다. 토지주가 사업 주체인 재건축·재개발과 달리 토지담보대출을 통해 토지 확보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역주택조합 사업 특성상 자금난에 훨씬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한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한계 상황에 이른 조합 가운데 출구전략으로 법원 파산을 이용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며 "이 경우 조합원들은 분담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고 전했다. '낡은 제도' 지적에 폐지론까지지역주택조합 사업은 무주택자 또는 전용면적 85㎡ 이하 1주택 소유자들이 스스로 토지를 매입해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다.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건축자금 조달, 마케팅 등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새집을 마련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지역주택조합 추진 사업지는 서울에서만 100여 곳이 넘는다.
하지만 제대로 입주까지 하는 지역주택조합은 전체 사업 가운데 17%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계획 승인 조건(토지 95% 이상 소유) 등을 맞추기 어려운 데다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사업 기간에 땅값과 공사비가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추가 분담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주택조합 운영진의 사기·횡령 사건도 꾸준히 불거지고 있다.
이에 지역주택조합 제도에 대한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도시정비사업 전문가인 김은유 법무법인 강산 변호사는 "도심에도 빈 땅이 많아 토지 확보가 쉽던 1970년대 도입된 제도로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며 "앞으로 자금난 등으로 파산하는 조합이 더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