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간의 서양미술을 꿰뚫어보다

입력 2024-06-10 17:38
수정 2024-06-11 00:39

서양미술의 역사는 넓고 깊다. 21세기 동시대 미술이 존재하기 전 유럽을 주름잡은 미술사조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다. 이름난 미술관에 가더라도 수백 년 전 만들어진 걸작들을 한꺼번에 눈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구한 유럽 미술의 맥을 이해하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은 이유다.

유럽 예술여행을 다녀오지 않고도 14세기 르네상스부터 20세기 현대미술까지 800여 년의 장구한 서양미술사를 눈에 담을 기회가 생겼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에 부스를 꾸려 애호가들을 홀렸던 로빌란트+보에나(Robilant+Voena·R+V) 갤러리가 지난 5일부터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 ALT.1(알트원)에서 소장품 기획전 ‘서양미술 800년’을 개최하면서다. 64점의 ‘마스터피스’들이 원화 그대로 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14세기 고딕 종교미술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16세기 르네상스, 17세기 바로크, 18세기 신고전주의, 19세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20~21세기 근현대 작품을 연대순으로 만나게 된다. 유럽 화가들이 앞선 예술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어떻게 관습에 도전장을 내밀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그만큼 로빌란트+보에나의 컬렉션은 독보적이다. 2004년 아트 딜러인 에드몬도 디 로빌란트와 마르코 보에나가 손을 잡고 영국 런던에 처음 문을 연 이 갤러리는 유럽 미술사를 수놓은 옛 거장들의 회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런던내셔널갤러리 같은 세계적인 박물관과 거래하는 갤러리로 성장했다. 2009년 이탈리아 밀라노, 2020년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에 차례로 분점을 내면서 미술계 주요 거점에 깃발을 꽂은 ‘큰손’ 갤러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시대별로 한 번쯤 들어본 대가들의 작품이 눈에 띈다. 르네상스 섹션에선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띠를 손에 쥔 성모 마리아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성 토마스, 성 프란체스코 그리고 성 율리아노’가 걸렸다. 바로크 섹션에선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활용한 거장 카라바조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 중 가장 성취가 뛰어난 여성 예술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두 작품은 가톨릭적 사유에 대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표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연하게 드러낸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에 걸린 바카로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도 반갑다.

18세기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유럽 도시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풍경화와 조화와 절제라는 신고전주의 이상을 구현한 작품들이 뒤를 잇는다. 풍경화 거장 카날레토의 ‘말게라의 탑’은 당대 정치, 상업, 문화, 예술의 중심지인 베네치아 요새의 위엄이 서려 있다. 장바티스트 우드리의 ‘라퐁텐 우화 속 어부와 작은 물고기’는 당시 유럽 화가들이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 형태가 드러나는데, 생명력 넘치는 개와 물고기의 모습까지 어우러져 우아한 감각이 돋보인다.

전시는 20세기 이후 전개된 근현대 미술의 흐름까지 짚을 수 있어 흥미롭다. 마르크 샤갈의 ‘마을 위의 붉은 당나귀’를 비롯해 피카소, 호안 미로의 회화, 마리노 마리니의 조각 등 서양미술의 분수령인 세계대전을 전후로 오랜 표현 방식을 탈피해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창조한 거장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지만 수백 마리 나비를 캔버스에 박제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생명의 나무’ 등 다양한 주제와 기법, 매체를 탐구하는 21세기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도 소개한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