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는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의 3주기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영롱함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38점의 작품이 걸렸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1층에 걸려 있는 1973년 작 ‘워터 드롭스(waterdrops)’. 별다른 장식이나 기교 없이 가로 123㎝, 세로 199㎝ 크기의 캔버스에 수천 개의 물방울이 그려진 작품이다.
반세기도 넘게 흐른 초기 작품이 인상 깊게 다가온 이유는 꾸준함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김창열은 별세 전까지 오로지 물방울만 그리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물방울을 통해 뉴욕과 파리의 냉대를 보란 듯이 이겨냈다. 김창열의 끈기는 물방울과 물방울이 존재하는 표면 관계로 예술의 본질을 재검토했다는 큐레이터의 설명 이상의 감동을 준다. 반세기 동안 물방울 그린 작가나이 여든의 성능경 작가는 또 어떤가. 경기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저항을 테마로 전시회를 열고 있는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이다. “이딴 걸 누가 예술이라고 하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1970년대부터 기행에 가까운 행위예술을 해왔고 마침내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15만 명을 불러 모으며 흥행한 미셸 들라크루아 개인전도 마찬가지였다. 아흔 살의 ‘파리 토박이’ 들라크루아가 50년 넘게 파리의 모습을 그려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성은 이미 논외가 됐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조촐한 규모의 판화전도 새로 열리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한국에서의 인기 비결을 묻자 “노르망디에서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렸다”며 “나의 이런 노력과 열정이 관람객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고 했다.
독하게 버틴 사람들 이야기는 미술계만의 것도 아니다. 지난달 새로 나온 책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는 과학계 인물들의 꾸준함을 다룬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명을 인터뷰해서 쓴 책으로 하나같이 천재로 불릴 만한 사람들인데,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집념도 만만치 않다. 샷 연습 하루 500번 하는 골퍼배리 배리시 칼텍 교수가 인류 최초로 중력파 검출기를 개발하기까지 40년 넘게 걸렸다. 가설로만 존재하던 제4의 물질을 발견한 칼 위먼은 말한다. “성공의 순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 모든 막막한 고민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뇌를 준비시키고 있었다는 것을요.”
끈기 독기 꾸준함 집요함 같은 단어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1년 전 골프 지면을 담당하면서 시작한 골프 때문일 것이다. 드라이버 연습을 4166번이나 했지만 골프공은 변변치 않은 거리로 사방팔방 흩어지고 있다. 때려치울까 생각하던 차에 쉰네 살에 우승컵을 들어 올린 골프선수 최경주가 하루에 500번의 샷 연습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됐다. 최경주 선수의 열흘치도 안 되는 스윙을 해놓고 포기를 하네 마네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외골수처럼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있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지치고 지루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라면 마지막으로 한 번쯤 거장들의 전시회를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