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음악은 아이가 치기에는 너무 쉽고, 어른이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아르투르 슈나벨(피아니스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어요.”
지난달 16일 데뷔 68년 만에 처음 모차르트 음반을 세상에 내놓은 피아니스트 백건우(78)의 말이다. 모차르트의 곡을 해석하는 백건우만의 열쇠는 ‘아이다운 순수’였다고 했다. 음반을 녹음하며 어린아이의 세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그는 녹음을 마칠 무렵 생각했다. ‘새 음반의 표지도 어린아이가 그려주면 어떨까.’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지금 대형 음반 매대 위 내로라하는 클래식 아티스트들의 음반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음반은 백건우의 신보 ‘모차르트: 피아노 작품1’이다. 그의 앨범 표지는 냉철함과 독기를 뿜어내듯 명도 대비가 뚜렷한 클래식 음반 사이에서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칠하다 만 듯 여백이 두드러지는 손, 삐뚤빼뚤 연필로 채워낸 은색 머리칼, 시선을 붙잡는 붉은 선, 그것들을 모두 감싸는 온화한 표정의 얼굴이 사람들의 시선과 발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이 앨범은 1898년 설립된 독일 클래식 음반 기업 도이체그라모폰(DG)이 제작했다. 다소 엉성해 보이는 그림 사이로 DG의 상징이자 클래식 마니아들에게 품질보증 수표와 같은 ‘노란 딱지’가 보이는 순간, 궁금했다. 이 그림 누가, 왜 그린 걸까. 건반 위 시인과 꼬마 화가의 운명적 만남
DG가 백건우의 파격적 제안을 받아들인 건 지난 2월이다. 한국 초등학생(2012~2017년생)을 대상으로 앨범 표지 공모전을 열었다. 수많은 그림이 출품됐고, 선정은 그가 직접 했다. 여러 장의 그림 가운데 그가 주저 없이 고른 단 한 장은 경기 용인한빛초등학교 3학년 이진형 군의 작품이다. 미완의 선과 점, 일부러 비웠는지 모를 여백과 빨강 마커 등 입시 미술의 관점을 전복하는 요소로 가득했다. 이 점이 오히려 백건우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술 전문가의 조언이나 솜씨를 덧대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건반 위 시인과 꼬마 화가는 서로 연결됐다.
진형이가 공모전에 그림을 출품하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같은 반,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구 엄마의 권유로 마감 이틀 전, 공모전 포스터를 전달받았다. 진형이는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을 알지 못했다. 용인에서 만난 진형이는 공모전에 참가한 이유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워서”라고 했다.
그리기 도구가 부족해 동네 미술학원에서 마커를 빌렸고, 어른의 도움 없이 혼자서 백건우를 검색해보고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2시간 만에 그림을 그려냈단다. 마감이 임박해 출품한지라 습작도 없다. 동네 학원에서 도구 빌려와 2시간 만에 완성
진형이는 “자연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곤충학자가 되고 싶어서 매일 백과사전을 들여다보고 곤충 소묘를 즐긴다. 여름이면 산으로 들로 곤충을 채집하러 다닌다. 지난해에는 매미에 빠졌었고 올해는 바퀴벌레를 탐구하고 싶다는 어린이의 얼굴에는 어떤 편견도 없었다. 그의 부모 역시 백건우의 열렬한 팬이거나 클래식 애호가도 아니었다. 진형이 아버지는 국립국악원 대금 연주자, 어머니는 전직 해금 연주자로 서양 클래식 음악과는 꽤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아이의 그림이 선택되고 음반이 발매된 직후, 백건우는 진형이 집을 방문했다. 그는 꼬마 화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자필로 담은 모차르트 앨범과 파버카스텔 미술도구 상자를 건넸다. 진형이 가족이 더 감동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이가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에게 진심 어린 지지를 받는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피아노의 거장은 진형이의 곤충 채집 상자와 그림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으며 “너는 정말로 대단한 아이”라고 격려했다고. 진형이 부모는 “백건우 선생님이 오신 후 거장을 만났다는 벅찬 감정보다는 은사님, 시대의 진정한 어른을 만났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모차르트 앨범을 시작으로, 백 선생님의 연주곡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를 향한 또 다른 여정 준비DG에서 삽화로 아티스트의 음반 표지를 기획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은 2018년 회고적 성격의 음반 ‘Retrospective’를 내면서 팬을 대상으로 그림을 공모해 앨범 표지로 썼다. 다만 힐러리 한의 레퍼토리를 꿰고 있는 팬들이 아니라면 쉽게 참여할 수는 없었던 터라 이번 백건우의 모차르트 앨범과는 기획 의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당시 힐러리 한의 음반을 보면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 연상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담겨 있다.
100장의 음반을 낸 베테랑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를 결심하는 데 7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백건우는 첫발을 뗀 이 행보를 묵묵히 밀고 나갈 계획이다. 그는 모차르트 연주회를 전국 곳곳에서 열며 올해 11월과 내년 4월께 새로운 모차르트 음반을 각각 발매할 예정이다. 그는 이후 앨범에도 어린아이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도이체그라모폰은…
카라얀과 계약한 후 '클래식 명가'로 도약…노란 딱지가 시그니처독일의 클래식 음반사로 1898년 설립됐다. 모기업은 유니버설뮤직그룹. 1950년대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반사 가운데 후발 주자로 인식됐으나 1958년, 베를린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이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 계약하며 전성기가 시작됐다.
1963년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필하모닉의 교향곡 전집 음반은 대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카라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발매하며 1990년대까지 그 명성을 이어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디 오리지널(The Original)이라는 ‘최고의 명반’ 시리즈 발매에 주력하고 있다. 튤립이 그려진 노란색 레이블 스티커는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음반사의 시그니처로 여겨지고 있다.
용인=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