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크로는 어떻게 화학 산업에서 디지털 트윈을 선도했나 [긱스]

입력 2024-06-10 14:42
수정 2024-06-1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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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학소재 기업 AGC(아사히글라스)가 디지털 전환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시기는 2021년이었다. 2023년을 목표로 세운 경영 계획 ‘AGC plus-2023’에 처음으로 ‘디지털 전환’ 단어가 등장했다. 제품 개발부터 세일즈까지 존재하는 비효율을 디지털 기술로 개선해 생산성을 늘리고 환경 보호에 이바지하겠다는 의도다.

작년부터 본격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정 디지털 트윈’이다. 1월과 4월 각각 유리 용해 공정과 염화 비닐 제조 공정에 대한 디지털 트윈 시스템 구축 성과를 발표했다. 모두 AGC 핵심 역량에 해당한다. 세계 최대 유리 생산량을 자랑하는 AGC는 최근 동남아시아 소재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관련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AGC 인도네시아 VCM 플랜트>

2016년 가동을 시작한 AGC 인도네시아 염화비닐(VCM) 플랜트는 당시 AGC 전체 생산량에서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었다. 건축 자재용 파이프, 농업용 비닐, 전선 피복 등 다양한 산업에서 필수로 활용하는 폴리염화비닐(PVC)의 원료인 VCM은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꾸준히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2021년 시마크로는 AGC와 함께 VCM 플랜트 디지털 트윈 시스템을 구축했다. 디지털 트윈은 점점 치열해지는 글로벌 화학업계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선택이다. 특히 판데믹 이후 중국 기업들이 설비를 대폭 늘리며 단가 경쟁을 시작했다. 기존 기업들은 체질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2023년 국내 산업계의 경우, 총수출량 자체는 증가했지만 단가 하락으로 수출액은 전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AGC가 갖고 있던 고민도 유사한 맥락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공정 디지털 트윈을 통해 이들이 더 나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했다. 더 낮은 단가와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한 제안이다.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작업이었고, 문제를 정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AGC와 우리가 가장 고민한 부분이었다.

<EDC 열분해 과정 순서도>

AGC VCM 플랜트에서는 다단계로 구성된 복잡한 분리 공정이 진행된다. 원료에서 열분해 반응을 일으키는 설비인 크래커(Cracker)만 해도 1000 미터가 넘는다. 여기에 VCM 원료 염화에틸렌(EDC)을 흘려보내고, 가열하는 과정을 거친다. 가장 강한 화력을 주입하는 단계에서는 설비 온도를 최대 900℃까지 올린다.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상당한 양의 가스 연료를 사용해야 한다. 꾸준한 가열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EDC 가 분해되어 VCM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화학 열분해 설비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천연가스 및 수소 등 혼합 연료 사용에 따른 높은 운전 비용과 환경 영향 등이 반영된 에너지 최적화에 대한 고민이 필연적이다.

압력 밥솥을 예시로 에너지 최적화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밥을 지을 때 가스레인지의 화구 크기와 개수, 그리고 불세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가장 가스를 적게 쓰면서 밥을 지을 수 있는지 잘 모른다. 일단 불을 올리면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방법은 시행착오뿐이다. 다양한 변수를 조정해보며 최적의 레시피를 찾을 수 있다. 만약 방법을 찾는다면 가스비를 일정 수준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는 노력 대비 보상이 적기 때문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다.

화학 플랜트에서는 소모하는 가스량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리고 수십년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가스를 덜 쓰면서 순도 높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숙련된 공정 엔지니어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론이 ‘밥짓기’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변수를 수정하고 올바른 방식을 찾는 수준에 그친다.

공정 디지털 트윈을 이용하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최적의 효율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만일 밥솥 내부에서 쌀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실시간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고, 가상의 밥솥을 두고 가열하는 조건을 달리해 수차례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으면 시행착오를 위한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이상적인 레시피를 확인할 수 있다.

<AGC가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한 VCM 플랜트 공정 디지털 트윈 시스템>

VCM 플랜트에서도 유사한 효과를 내고자 했다. 먼저 실제 공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투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각 공정 단계에서 열효율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열효율과 제품 순도를 저하하는 불순물이 튜브 안에서 얼마나 발생하고 있는지 추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마련한다.

실시간으로 쌓이는 데이터가 가상 설비와 만나면 공정 디지털 트윈이 완성한다. 실제 설비와 동일한 물리적 조건을 갖춘 가상 설비를 구축하고, 공정 데이터를 적용하고, 수학적 예측 모델을 활용해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으면 정밀한 가상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당시 AGC에서 수십년 플랜트 공정 관리를 해왔던 엔지니어도 놀라움을 표했다. 어떤 지표는 자신이 예측한대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확인했지만(이 또한 경력에서 비롯한 성과다), 또 어떤 지표는 예상치 못한 추이를 보였다. 그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우리에게 시뮬레이션을 요청했다. 화구 위치를 달리 설정한 공정의 가상 결과치를 보고 싶다는 의사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부 화구가 비효율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옳았다. 디지털 트윈 플랜트 내 화구 위치를 조정하고 가상 운전을 진행하니, 더 적은 화력으로 동일한 공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AGC는 분석 결과를 믿고 과감히 실제 설비를 조정해 테스트했다. 가상 현실의 결과가 그대로 구현됐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을 일부 수정했다. 또한 디지털 트윈 시스템 유지보수와 고도화를 우리에게 의뢰해 지속적으로 시스템을 성장시킬 의도를 내비쳤다.

<자카르타에서 AGC 직원들과 실시간 디지털 트윈 검증을 기념>

AGC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화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디지털 전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체 산업에서 IT 융합이 보편적으로 진행되던 2021년 당시를 생각하면 절대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없다.

화학 산업에서도 디지털 트윈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 자체는 완성된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규모 플랜트의 디지털 트윈을 구축할 때에 활용하는 소프트웨어는 이미 수년 전부터 사용하던 제품들이다. 다만, 산업 특성상 디지털 전환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잠재력을 완전히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여타 제조업 공정은 엄격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이뤄지지만, 화학 플랜트는 생산 설비가 야외에 있다. 기온, 습도, 바람 등 외부 변수에 생산 효율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정이 진행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공정 디지털 전환을 위한 인사이트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든다. 엔지니어들도 설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론에 기반해 상상할 뿐이었다. 공정이 비정형적인 데다, 문제 발생 시 무엇이 원인인지도 명확히 파악할 수가 없으니 디지털 전환은 요원한 일이었다.

따라서 공정에 존재하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면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AGC 공정 디지털 트윈을 구축할 때 총 5개 소프트웨어를 활용했다. 설비가 가진 물리적 특성을 가상으로 구현하고, 공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원료의 화학적 변화를 이론적으로 계산하고,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센서값을 데이터로 변환해 축적하고, 이를 활용해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고 그래프로 시각화해 보여주는 모든 과정에 각각 다른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화학 공정에 대한 전문성 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화학 회사에 개발 조직은 만무하고, IT 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 조차도 없기 때문에 IT 융합이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작은 스타트업 시마크로가 다양한 산업 리더들과 어깨를 맞대고 협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IT 융합 전문성에 있다. 디지털 모델링, 시뮬레이션, 최근에는 디지털 트윈까지, 디지털 혁신을 실현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인정받았다.

<아스펜테크 동경 행사에서 한국/일본 지사 동료들과(왼쪽), 삼성토탈 이진석 박사님과 컨설팅 후(오른쪽)>

나는 10여년 간 아스펜테크(Aspen Tech)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아스펜테크는 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점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OS의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베이스의 오라클과 같은 위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00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Edinburgh University)에서 분자 모델링 박사 후 과정을 밟다 아스펜테크에 입사했다. 그들은 이미 산업 공정의 디지털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품 이름은 아스펜 커스텀 모델러(Aspen Custom Modeler), 다양한 산업 설비의 물리화학적 특성을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나는 프로그램 개발자로서 아스펜 커스텀 모델러뿐 아니라, 2012년 퇴사하기 전까지 지금 활용하는 대부분의 아스펜 엔지니어링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했다. 아스펜테크 퇴사 이후에도 테크닙(Technip), 사빅(SABIC) 등 유수 엔지니어링 기업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2018년에는 시마크로를 창업하며 아스펜테크 글로벌 파트너로서 이들 제품을 각 기업에 소개하고 도입을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엔지니어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이 겪는 고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사용자 편의성이다. 데이터 분석의 기본인 시각화조차 기본 소프트웨어로 구현하기 어렵다. 데이터를 모을 때에도 엑셀을 활용하는 등,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짜깁기’해야 한다. 개발 조직이 아니다 보니, 기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더라도 이를 실무단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없으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그리고 최근 기업들이 요구하는 솔루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문제점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프로세스메타버스 솔루션 화면 - 공정캔버스 (Process Canvas) 와 생성AI 코파일럿 (GenAI Copilot) 사용>

공정 디지털 트윈을 위한 새로운 도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프로세스메타버스(ProcessMetaverse)’를 기획하게 된 계기다. 공정 디지털 트윈을 다양한 기업에서 손쉽게 도입할 수 있는 ‘만능’ 솔루션을 개발하면 전세계에서 주목하겠다고 생각했다. 프로세스 메타버스는 SaaS 솔루션으로서 공정 최적화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설비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원하는 기준에 따라 배열하고, 시각화하고, 레시피를 변경했을 때 공정 과정과 결과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예측하고, 최종적으로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공정 최적화를 위한 조언까지 받을 수 있도록 개발 중이다. 업무 편의성 면에서도 그래프와 보고서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등 엔지니어가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원할 수 있다.

올해부터 우리는 제품 개발과 더불어 필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AGC를 포함해 HD현대오일뱅크, CJ 제일제당, 삼성물산 등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MVP를 검증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어 개발이 속도를 더하고 있다. 제품이 그만큼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모든 화학, 에너지, 바이오 공정 엔지니어들이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전환 솔루션으로서 프로세스메타버스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고도화에 힘쓸 계획이다.


□시마크로 윤정호 대표

기업가, 화학 공학자이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아스펜테크, 테크닙, 사빅 등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을 거치다 2018년 미국 보스턴에서 시마크로를 창업했다. 화학과 바이오 공정 디지털 혁신을 위한 솔루션 ‘프로세스메타버스’를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