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대법원 손에 달려
"제품의 결함이다" vs "운전자 페달 오조작이다"
둘 사이에서 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여전히 결론은 나지 않았다. 1심과 2심에서 급발전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사례는 있지만 대법원은 없다. 하지만 하급심의 결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낮아 사고 책임이 없다'로 귀결된다. 이 얘기를 뒤집으면 사고 책임은 제조물, 즉 자동차 자체에 있다로 해석된다. 하지만 자동차회사는 내부 기록 장치인 'EDR'로 맞선다. EDR 기록에는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밟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EDR 기록 데이터 오류 가능성을 주목한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막힌다. 프로그램 로직 상 EDR은 사고 5초 전 운전자가 어떤 페달을 조작했는지, 속도는 얼마에 도달했는지를 기록한다. 마치 블랙박스와 같다. 충격이 감지되면 즉시 기록하도록 설계돼 있다. 그런데 EDR의 순간 기록과 급발진은 별개의 영역이다. EDR은 기록장치일 뿐 급가속 현상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방지하는 역할은 아닌 탓이다.
이때 법원이 주목하는 것은 EDR 기록의 신뢰성이다. 강릉 급발진 사고의 재연 시험을 통해 밝혀진 것은 EDR 기록을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EDR 기록을 믿지 못한다면 운전자 과실이 아닌 만큼 제조물 결함으로 판결나야 한다. 그러나 제조사는 EDR 기록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해도 실제 사고 발생 때와 동일한 도로 조건, 온도, 습도, 풍향, 기온까지 들먹이며 재연의 유사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급발진이라는 제품 결함이 발생한 그 순간, 많게는 수십 가지 조건이 모두 일치했느냐 여부를 따진다. 다시 말해 재연 시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제아무리 급발진 재연 시험이라도 100% 완벽한 동일 조건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제조사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물론 대법관도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은 판결을 내려야 한다. 피해자 손을 들어주면 제조물 결함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과학적 검증은 불가능하다. 반면 제조사 손을 들자니 피해자의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낮다.
흔히 과학을 논의할 때 중요한 것은 동일 조건, 동일 현상의 재현이다. 특정 현상을 발견했다면 해당 현상이 일어나는 조건이 명확해야 하고, 제3자가 실험을 해도 같은 결과가 도출돼야 한다. 그래야 과학적 발견으로 인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간혹 논문 조작 등이 이슈로 떠오를 때 검증 방법은 동일 시험, 동일 결과 일치 여부다. 일치하지 않거나 조건이 다르면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대법원 판결은 아직이지만 관건은 급발진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느냐다.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도 존재하겠지만 여전히 원인은 미스테리다. 인위적으로 급발진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곳곳에서 순간 벌어지는 급발진 현상이 실험실 내부 조건과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급발진 인정 사례는 해외에서도 없다.
물론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도 꾸준하다. 정부도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지만 밝혀내지 못했다. 결국 무한정 예산을 투입할 수 없어 중단했다. 찾을 가능성조차 낮은 실험에 지속적인 예산 투입이 부담스럽다. 게다가 애써 예산 투입해도 원인을 찾지 못하면 국민적 비판에 시달린다.
일단 모든 시선은 대법원에 쏠려 있다. 대법원이 급발진을 인정하면 제조사는 과학적 근거를 요구할 것이 뻔하다. 반대로 급발진을 인정하지 않으면 피해자의 구제 방법은 없다. 과연 누구 손을 들어줄 것인가? 대법원도 고민이 깊을 것이다.
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공학박사)
▶ 기아, 'EV3' 계약 시작...4,208만원부터
▶ [시승]매력 가득한 소형 SUV, 르노 아르카나 1.6 GTe
▶ 1~4월 친환경차 수출 26만대 넘기며 청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