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이혼에 '노태우 비자금' SK 유입 확인…환수 가능할까?

입력 2024-06-01 00:00
수정 2024-06-02 11:44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이혼 소송 항소심 재판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이 SK에 유입됐다는 판단을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인됐다.

불법으로 조성된 비자금인데 재판부가 이를 재산분할 대상으로 인정하면서 '합법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이를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최 회장 측도 설령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이 최종현 SK 선대 회장에게 유입됐더라도 불법 자금에 해당해 재산분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형사재판과는 달리 가사소송에서는 분할 대상 재산의 불법성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국가가 몰수하기 어렵다는 게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단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이나 최 전 회장이 모두 사망했고 소멸 시효 문제도 있기에 수사 기관이 비자금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사에 나서기가 어려운 상태다.

앞서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판사 김시철 김옥곤 이동현)는 지난 30일 두 사람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은 노 관장에게 재산 분할로 1조 3808억 1700만 원, 위자료로 2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 재산 분할 액수가 665억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20배 이상 늘어났다. 1심과 달리 노 관장 측이 SK그룹 가치 증가나 경영 활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한 결과다.

1조3800억원대라는 역대 최대 규모 재산 분할액이 나온 데에는 노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옥숙 여사의 '선경 300억' 메모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노 관장 측은 항소심 재판부에 1990년대 노 전 대통령이 사돈 최종현 선대회장 등에게 300억원대 비자금을 건넸다고 주장하며 대가로 갖고 있던 약속어음과 김 여사의 메모 등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된 김 여사의 메모 제목은 '1999.2.12 현재 현금상황'이었다.

'선경 300억', '최 서방 32억'이라고 써 있고, 금고, 방, 별채 그리고 1억원, 5억원, 10억원이라고 적은 걸로 파악됐다. 이외에도 적혀 있는 돈을 모두 더 하면 9백억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13년 전, 추징금 수사 때도 검찰에 압수 안 된 메모가 딸의 이혼 재판에서 제출된 것이다.

이미 30년 전의 일이고 추징금을 다 낸 데다가 노태우 씨가 고인이 돼 더 이상 수사를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재산 분할 액수가 많이 늘어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그룹 자산 형성에 기여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최 회장 측이 "노 관장 측이 1990년대 발행된 약속어음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는데도 1심에서 제출하지 않다가 항소심에서 새로운 주장을 하며 제출했으므로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법적인 자금'의 분할이 적법하지 않다는 주장 역시 1991년 당시 최 선대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 자체는 당시 형사상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가사·양육 측면의 가치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노 관장은 자녀 3명 양육을 전담했고 최 회장 모친 박계희 여사가 사망한 후 대체·보완재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자녀들은 탄원서를 통해 '끝까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는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아버지 최 회장을 표현했다..

이혼 소송 역사상 위자료 20억원은 전례 없는 액수로 평가된다. 재판부는 "최 회장이 부정행위 상대방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 공개 활동을 지속하는 등 상당 기간 부정행위를 계속했다"며 "헌법이 보호하는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아울러 최 회장이 2008년 11월 노 관장에게 보낸 자필 편지에서 '내가 김희영에게 이혼하라고 했다. 모든 게 내가 계획하고 시킨 것'이라고 적은 부분을 언급하며 "노 관장과의 혼인관계를 존중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