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공시라고 당장 새로운 게 있겠습니까. 당분간 ‘보여주기’ 공시가 나올 수밖에 없죠.”
지난 28일 키움증권의 ‘밸류업 1호’ 공시를 본 한 증권사 대표의 얘기다. 정부 ‘기업 가치 제고(밸류업) 계획’이 본격화한 가운데 공시 포문을 연 기업들은 구설에 올랐다. 정부가 “기업 가치를 올릴 방안을 자율적으로 발표하라”며 판을 깔아줬더니, 키움증권이 기존 주주환원책을 정리한 수준을 내놓은 게 시작이었다. 화살은 KB금융으로도 향했다. KB금융은 공시 자체로는 키움증권보다 하루 빨랐다. 하지만 내용은 ‘4분기 발표 예정’이라는 안내 공시에 그쳤다.
키움증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시에서 3년간 자기자본이익률(ROE) 15%, 주주환원율 30% 이상을 3년 내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체 자기주식 209만5345주를 2026년 3월까지 소각하고, 초대형 투자은행(IB) 인가를 추진해 수익을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업계는 이 역시 허탈하다는 반응이다. 키움증권은 지난 3월 동일한 내용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했다. 이 중 70만 주는 이미 소각까지 진행했다. 초대형 IB 신청 역시 익히 알려진 목표다. 지난해 대규모 주가 조작 연루 의혹으로 작업이 중단되기 전에도 숙원 과제였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고민의 흔적이 없다”고 했다. 금융사들이 밸류업 공시 허용 첫날과 둘째 날 잇따라 공시를 내놓자 일각에선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1호 공시들이 왜 이런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복잡한 정부 밸류업 계획 가이드라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이 수익을 어떻게 벌어들일 것인지, 그리고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주주에게 환원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것이다. 수익 확보 계획은 사실 새로운 게 나올 리 없다. 기업설명회(IR) 등을 통해 공개되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정부의 가이드라인 설명회에서도 “사업 보고서에 포함된 내용이고, 중복 공시 부담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여기에 주주환원책마저도 파격을 바라기 어렵다는 예측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밸류업 계획이 마치 자사주 소각 일정을 밝히라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부실한 경영권 방어 수단 때문에 골치 아픈 상장사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미 마련한 차등의결권·포이즌필 도입은 기약이 없다. 오히려 무거운 상속·증여세에 대주주들은 주가 하락을 바라는 지경이다. 부실 공시가 늘어나 비판의 ‘채찍’만 가해진다면 소액주주는 얻는 것이 없다. 기업에 ‘확 달라진 공시’를 내놓으라고 압박할 게 아니라 적절한 ‘당근’도 제시해야 한다는 게 증권업계의 한결같은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