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장사를 40년 가까이 했는데 이런 적은 없었어요. 요즘엔 임차료 없이 관리비만 내라고 하는데도 임차인이 없어요.”
지난 28일 찾은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의 통일상가에서 만난 한 상인은 시름 가득한 얼굴로 텅 빈 가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전국에서 전세 버스를 대절해 물건을 떼가려는 소매상으로 붐볐는데, 지금은 텅텅 비었다”고 했다. ○“관리비만 받아도 임차인 없어”동대문 패션타운이 벼랑 끝에 몰렸다.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이곳 도소매 상가건물 32곳 중 14곳의 공실률이 두 자릿수다. 소매상가인 맥스타일은 공실률이 86%에 이른다. 점포 10곳 중 9곳 가까이 비어 있는 셈이다. 디자이너클럽(77%)과 굿모닝시티(70%)에서도 절반 이상의 점포가 문을 닫았고, 혜양엘리시움(44%), 헬로에이피엠(37%) 등의 공실률도 늘고 있다.
동대문 패션타운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급성장하면서 방문객이 줄자 소매시장이 먼저 타격을 입었다. 2016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태,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중국인을 비롯한 관광객 유입이 사실상 끊겼다. 엔데믹 이후에도 회복은 요원하다.
최근 이용자가 폭증한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 등 중국 e커머스는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이들이 초저가 의류를 판매하면서 동대문 패션타운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동대문에서 유통되는 옷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으로 대체된 데다 알리와 테무에서 비슷한 옷을 싸게 주문할 수 있는데 누가 동대문을 찾아오겠냐”고 말했다. ○도매도 광저우·항저우에 밀려도매시장의 전망도 밝지 않다. 지금까지는 디자인 기획력과 품질에서의 비교우위를 바탕으로 중국 업체의 염가 공세를 막아냈지만, 중국의 의류 산업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한 패션 플랫폼 관계자는 “지금은 중국산과 품질 차이가 있지만, 격차가 더 좁혀지면 도매시장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동대문 도매시장을 찾던 외국인 바이어 수가 최근 눈에 띄게 감소했다고 이곳 사람들은 전했다. 중국 광저우·항저우 도매시장에서 파는 옷의 품질이 좋아져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바이어들까지 동대문으로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도매상의 주요 고객이었던 국내 소매상도 중국 도매상과 e커머스로 눈을 돌리고 있다.
동대문 도매상과 소매상을 이어주던 플랫폼이 하나둘 폐업하면서 위기는 현실로 다가왔다. 2012년 설립된 도매 플랫폼 ‘링크샵스’는 올초 문을 닫았다.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처음으로 사입 중개 서비스를 시작해 한때 벤처캐피털에서 200억원 가까운 투자를 받았지만 거래량이 줄어들면서 결국 폐업했다. 지난해에는 또 다른 도매 플랫폼인 ‘골라라’가 서비스를 중단했다.
일각에서는 동대문 패션산업 경쟁력이 약화한 만큼 패션타운 상가에 문화시설 등을 들여 상권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상가의 용도를 바꾸려면 현행법(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판매·운수시설로 명시된 용도 외에 문화·집회·운동시설 등을 추가하도록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대식 동대문패션관광특구 사무국장은 “문화시설을 입점시키려 해도 현실적으로 용도변경 의결 요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다”며 “법 개정으로 집객 시설을 유치해 활로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지윤/라현진 기자 y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