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 번쩍이는 플래시…원초적 욕망을 포착하다

입력 2024-05-30 19:16
수정 2024-05-31 02:34

영국 사진작가 자나 브리스키의 사진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다. 미리 준비해둔 대형 인화지 근처로 동물과 곤충이 다가온 순간 플래시를 터뜨려 그림자를 기록한다. 일명 ‘포토그램’ 기법으로 완성된 그의 작품은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배제한다. 원시 상태 사진술에 가깝다. 작가가 자연의 생명을 조우했을 때 느꼈을 경이롭고도 신비한 감정이 오롯이 전해지는 이유다.

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에서 열리는 ‘밤 끝으로의 여행’ 전시는 ‘밤’을 주제로 국내외 사진 거장 32명의 작품 100여 점을 살펴본다. 1900년대 초반 고전부터 컨템퍼러리까지 20년간 뮤지엄한미가 수집해온 작품이다. 구본창(1953~), 김재수(1929~2006), 만 레이(1890~1976), 브라사이(1899~1984) 등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다.


이들이 포착한 밤은 현대인의 고독을 끄집어낸다. 앤설 애덤스의 ‘뉴멕시코 허낸데즈의 월출’이 광활하게 펼쳐낸 도시 풍경 주위로 모리야마 다이도의 ‘들개’가 배회한다.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플랫아이언 빌딩’에서 인간 문명의 불이 꺼지면 브리스키의 밤 곤충의 시간이 열린다.

‘욕망’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다. 낮 동안 억눌려 있던 욕구가 어둠과 함께 격동적으로 분출하는 듯하다. 꽃잎, 달걀이 든 유리그릇, 깃털, 조개 등 여성과 남성 신체를 연상시키는 피사체들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성의 신체가 남성 손안에 속박된 듯 묘사한 제리 유엘스만의 ‘포토몽타주’도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죽음 역시 어둠과 불가분의 관계다. 싸늘한 긴장감과 공허함 등 불편한 심상을 반복적으로 투사한 사진들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마리오 자코멜리의 ‘12월 31일’과 ‘시를 위하여, 자화상’은 노년의 작가가 꿈에서 만난 장면을 재현한 사진들이다. 작가 본인의 모습이나 흰 비둘기, 들개 등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열리는 ‘무한함의 끝’은 사진이 독자적 예술 장르로 거듭나는 데 기여한 작가를 한자리에 모았다. 고명근, 권부근의 작품을 비롯해 국내외 유명 사진 작업 21점을 걸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기괴하게 분장한 광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 현대 사진계에서 가장 입지적 인물인 신디 셔먼의 ‘광대’(2003~2004) 시리즈다. 촌스러운 의상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여성 같은데 목젖이 돌출된 듯한 연출은 화면 속 인물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광대의 정체는 셔먼 본인이다. 대중매체에서 소비하는 여성 이미지를 차용해 가부장적 남성 사회를 은연중에 비판하려는 의도다.

다른 작품의 존재감도 셔먼에게 밀리지 않는다. 작가 본인이 3년에 걸쳐 아홉 차례 성형수술한 과정을 기록한 프랑스 작가 오를랭, 인터넷에 나도는 포르노그래피 누드 사진을 연출한 토마스 루프 등의 작품은 충격적이다. 자극적인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1965년부터 2011년 작고하기까지 자신의 초상을 반복 촬영한 로만 오팔카의 ‘인생 프로그램’은 잔잔한 여운을 준다.

전시장 지하 1층에 걸린 ‘최후의 반란’(2005~2006)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 작가 그룹 AES+F가 연출한 대표작이다. 전쟁과 살인, 화산 폭발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을 영국 로열발레단 소속 청년 모델이 재현했다. 자극적인 주제와 대조되는 정갈한 화면이 이질감을 자아낸다. 구도는 낭만주의 시대 정통 서양화를 연상시키고 일본도와 야구방망이, 총을 든 청년의 이미지에선 초현실적 분위기마저 감돈다. 작품이 ‘반란’을 벌이는 상대는 사진을 그림의 ‘보조’로 단정하는 예술계의 편견일지도.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