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또 다른 '변신'…안전모까지 개발?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4-05-28 18:13
수정 2024-05-31 23:01

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나 포르지치 7번지가 나온다. 이곳에 고풍스러운 호텔 ‘센추리 올드 타운 프라하 M갤러리’가 있다. 1층 로비에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두상이 보인다. 벽에는 카프카 사인이 새겨져 있다. 식당 이름도 카프카 레스토랑이다. 이 호텔은 카프카가 오랫동안 근무한 노동자재해보험공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1908년부터 1922년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 노동자재해보험공사는 우리의 근로복지공단이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해당하는 공공기관이다. 23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원과 민간 보험회사를 거쳐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이직한 그는 5년 만에 부하 30명을 거느리는 부서기로 임명됐다. 전체 직원 250여 명 중 유대인은 그를 포함해 3명밖에 없었지만, 1920년에는 서기로 승진했고 1922년엔 서기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와 상사들의 호평을 받는 엘리트 직원이었다. 유머 감각도 있고 사회성도 좋았다. 이전에 다닌 민간 보험회사에서는 온종일 찌들어 지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업무도 무척 힘들었다. 결국 9개월 만에 이직했다. 재해보험공사에서는 오후 2시에 업무가 끝났기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간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업무 능력과 창의력도 빛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 장비에 부딪히거나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잦았다. 그는 하루가 멀게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공식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했다. 생생한 그림까지 곁들였다. 그의 보고서는 핵심을 찌르는 내용과 간결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보고서가 아니라 생때 같은 노동자들의 목숨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재해를 줄일 수 있을까.’ 밤새 고민하던 그는 손가락 사고를 막는 보호 장치를 고안했다. 상황별 안전 수칙도 만들었다. 법률 지식이 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소송 비용까지 대줬다. <넥스트 소사이어티>를 쓴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이 무렵 산업용 안전모를 개발한 인물이 카프카다. (드러커의 주장과 관련해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덕분에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전신) 제철산업의 산재 사망률이 1000명당 25명 이하로 처음 내려갔다고 한다.

당시 안전모는 지금보다 조악한 상태였다. 카프카는 특허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안전모의 목적은 외부 충격을 튕겨내는 게 아니라 충격파를 흡수, 분산하는 것이다. 외장을 강화 플라스틱으로 둘러싸고, 내부를 스티로폼으로 덧대며, 머리에 닿는 부분을 고정식 라이너로 구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전모는 노동자 생명과 직결되고, 산업사회 전체의 안전망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충격파 흡수’라는 요소는 카프카의 문학적 특질과도 연계돼 있다.

카프카는 재해보상 업무를 통해 거대한 관료기구의 폭력 앞에 무기력한 노동자의 현실, 전체주의 조직과 고립된 개인의 상관관계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소설 ‘변신’과 ‘소송’ ‘성(城)’ 등에 투영됐다. 소설 ‘소송’에서는 서른 번째 생일날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요제프 K가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에 휘말리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구속과 억압,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관료주의’와 부조리한 세상 속의 무력감을 그려냈다. ‘성’에서는 주인공 K가 외지인으로서 성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지만 끝내 굳게 닫힌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묘사했다. 가장 뛰어난 발명품은 언어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전체주의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 충격파를 흡수하고 분산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그 자신도 그랬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강압과 폭언, 심리적 위축과 우울증에 시달린 어머니의 불안, 문학과 예술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 자신의 고뇌 등이 여기에 겹쳐 있다. 직장인으로서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작업이 ‘안전 장치 개발’ 같은 것이었다면, 작가로서 궁극적인 구원의 통로이자 유일한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같은 시기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브래지어 후크와 신개념 스크랩북을 개발했다가 시장의 외면으로 실패한 것과 달리 카프카는 ‘충격파 흡수’로 많은 이의 목숨을 구했으니 현실과 문학에서 동시에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 세기 앞서 피뢰침을 발명하고 특허권을 내놓은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카프카도 안전모 특허를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언어와 문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100주기(6월 3일)를 앞두고 최근 출간된 <카프카, 카프카>(이기호 신형철 박해현, 나남)의 아포리즘에 나오듯 “깨끗이 쓸자마자, 거듭 마른 낙엽으로 뒤덮이는 가을 길처럼” 세상이 부질없더라도 우리는 “문학의 빗자루”로 낙엽을 계속 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야 할 길이 아주 먼 곳까지 나 있으므로 야무지게, 야무지게! “손이 돌을 움켜쥐듯이 야무지게. 하지만 야무지게 움켜쥐는 것은 오로지 돌을 더 멀리 던지기 위함이다. 그런데 길은 그 먼 곳까지도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