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번지' 식당엔 늘 친구들이 있었다

입력 2024-05-24 19:11
수정 2024-05-25 00:31
학교 앞 1번지를 언제부터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입학하자마자, 어쩌면 입학식도 치르기 전이었을 테다. 1번지는 치킨집이지만 우리 안주는 주로 노가리와 번데기, 쥐포 같은 것이었다. 치킨 냄새를 맡으며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 노가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1번지 주인아저씨는 늘 무심한 얼굴로 생맥주를 담아주거나 치킨을 튀겼다. 손님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친절한 건 아니다. 술 먹다 돈이 모자라면 학생증을 대신 받아주는 곳도, 학교 행사 때 후원금을 받기 위해 늘 첫 번째로 들르는 곳도 1번지였다.

1번지에는 늘 아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아마 늘 오는 사람만 와서 그랬을 테다. 우리는 1번지에서 동아리 뒤풀이를 했고, 학회 뒤풀이를 했고, 공연 연습 뒤풀이를 했고, 집회 뒤풀이를 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또 아는 얼굴이 와 자연스레 어울려 앉았다. 먹은 대로 돈을 내지도, n분의 1을 하지도 않았다. 있는 사람이 더 내면 됐고, 없는 사람에게 생맥주 한잔 못 사줄 이유도 없었다. 제법 술이 돌고 나면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박찬일 셰프의 <밥 먹다가, 울컥>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식당은 1번지였다. 음식에 쌓인 오래된 그리움을 털어놓는 에세이인 이 책은, 막막한 유학 시절 고추장과 멸치를 챙겨 보내주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후배, 친정 간 새댁 대신 봐주기 시작한 가게를 40년째 운영하고 있는 군산 ‘홍집’ 주인 등 어렵고 허기진 시절을 함께 지낸 사람들과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대학 시절 철없고 무지하던 내 곁에는 자기 할 일은 미루면서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알려준 선배들이 있었다. 공부는 안 했어도 가방에 시집 한 권 넣어 다니며 좋은 시를 읊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미약하게나마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세상일에 관심을 두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때 1번지에서 함께 노래 부르던, 남의 일 먼저 챙기느라 사회가 말하는 성공과 거리가 멀어진 그들 덕분이다.

그때보다 훨씬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비싼 안주에 술을 마셔도 그때처럼 흥이 나지 않는 건, 술자리 대화가 할 일을 미루고 공부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부동산과 주식과 입시와 건강과 노후 같은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일까.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