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 숨은 명곡부터 단테의 소나타까지…7번의 커튼콜 쏟아진 카네기홀의 조성진

입력 2024-05-23 17:50
수정 2024-05-24 02:28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6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다. 모차르트는 18개, 베토벤은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으니, 이들과 비교해도 상당한 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든은 피아노보다는 교향곡이나 현악 사중주 작곡가로 더 친숙하다. 지난 17일 저녁 미국 뉴욕 카네기홀 아이작스턴 오디토리움 무대에 피아니스트 조성진 리사이틀의 문을 연 건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4번.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세계 속으로 청중을 차분히 안내했다.

하이든의 이 곡은 제한된 소재를 사용해 만든 건축물과 같다. 그런 작품이 단순함, 혹은 밋밋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성진은 한 음 한 음 정성을 기울여 색을 입혔다. 빠른 악장에서도 흥겨움이나 유머보다는 은은한 색조가 돋보였다.


이어 연주된 곡은 하이든 서거 100주년을 추모하며 모리스 라벨이 1909년 작곡한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였다. 역시 콘서트홀에서 흔하게 만나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연주 시간도 2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곡이다. 라벨은 이 작품에 하이든이 쓴 곡을 사용하지도, 그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소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하이든의 이름 스펠링 앞 글자를 사용해 곡을 썼다. 하이든의 이름 ‘HAYDN’을 알파벳 순으로 펼쳤을 때 계이름인 CDEFGAB에 해당하는 다섯 음 -BADDG-를 중심으로 작곡한 곡이다. 2분도 채 안 되는 소품을 간결하게 소화한 그는 이어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 M.68’로 여정을 떠났다. 9년 전 쇼팽 콩쿠르 우승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 대열에 합류한 조성진이 이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아티스트로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레퍼토리였다.

2부에서 어둑한 무대 위로 다시 걸어 나온 그는 피아노와 마주 앉은 뒤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동안 천장을 응시하던 조성진은 길게 뻗은 왼손을 건반 위에 살포시 내려놨다. 그렇게 시작된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두 번째 해: 이탈리아’. 이 작품은 화가이자 건축가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시인인 로사와 페트라르카의 작품들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쓰인 7개 곡이다. 연주 시간만 1시간에 이르는 대작으로 리스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작품이 연주로 표현되는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조성진은 한 음마다 공을 들이면서 동시에 먼 곳을 조망했다.

첫 여섯 곡은 마지막 곡을 위한 긴 여정이다. ‘단테 소나타’로도 불리는 마지막 일곱 번째 곡은 가장 극적인 장치들이 가장 리스트적인 방법으로 폭발한다. 20분에 달하는 긴 호흡의 드라마에서 연주자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곡은 조성진과 인연이 깊다. 2011년 17세이던 조성진은 당시 3위에 입상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단테 소나타를 연주했다. 카네기홀에서 다시 만난 서른 살의 조성진은 이토록 뜨거운 곡을 오히려 냉정하고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풀어냈다. 자신의 감정과 에너지가 쏟아져 내리는 날것의 연주 대신 마치 완벽한 퍼즐처럼 틀림없이 그 자리에 갖다 놓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무미건조하거나 차갑지 않았다. 이성을 여유롭게 내려놓은 곳에선 우아함이 피어올랐다.

중반을 지나 등장하는 옥타브 속주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경주마들의 역주와도 같았다. 천상에서 영원히 빛날 것 같던 영롱한 트레몰로를 지나 작품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온 D장조는 세상의 마지막 날, 하늘에서 들려올 것만 같은 총천연색 교향악과 같았다.

조성진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연주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쾌하게 답한다. 그래서 그의 연주에는 단서가 붙지 않는다. 이유가 보이기 때문이다. 긴 터널을 지나온 조성진은 객석에서 전한 꽃다발을 받으며 비로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일곱 번의 커튼콜 행진을 이어가던 그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쇼팽 폴로네이즈 6번 ‘영웅’을 연주하며 청중의 갈채에 화답했다.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