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는 김모씨(57).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와 30년간 직장생활을 한 그에겐 은퇴 후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조그만 펜션을 운영하며 노년을 보내는 게 남은 소원이다. 지금이라도 창녕에 집을 한 채 구입해 펜션 사업을 시작할 의향도 있지만 쉽지 않다. 현행법상 농어촌에서 민박 사업을 하려면 관할 시·군·구에 최소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직장에서 은퇴한 다음 펜션 사업 준비를 위해 가족을 떠나 고향에서 혼자 지낼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농촌이 소멸한다는데 이런 규제를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고민이 이르면 올해 사라질 전망이다. 정부가 농촌 소멸 대응 방안의 일환으로 30년 묵은 농어촌 민박 제도를 손보기로 해서다. ○‘사전거주의무’ 완화 추진
22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농어촌정비법을 개정해 농어촌 민박 사업의 걸림돌로 지목된 ‘사전거주의무’를 완화 또는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인구 소멸지역의 골칫거리인 빈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빈집을 활용한 민박 사업을 제도적으로 허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일정 요건을 갖춘 법인이 농어촌에서 민박 사업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농촌 소멸에 대응한 농어촌 민박 제도 개선 및 활성화 방안’을 다음달 중순쯤 발표할 예정이다. 농식품부는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등과 막바지 협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행 농어촌정비법에 따르면 농어촌에서 민박 사업을 하려면 소정의 거주 요건을 갖춰야 한다. 직접 소유한 단독주택으로 사업하려면 관할 시·군·구에서 6개월 이상, 임차 주택으로 하려면 3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 2018년 12월 강원 강릉의 한 민박집에 머물던 고등학생들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농어촌 민박의 허술한 관리 실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정부가 후속으로 마련한 대책이다. 이를 두고 “안전시설은 강화해야 하지만 사전거주의무까지 부과하는 것은 농어촌으로 외부 사람을 불러들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정부가 다시 해당 요건을 완화 또는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다.
정부는 농어촌정비법을 개정하면서 빈집을 활용한 민박 사업도 허용하겠다는 방침이다. 현행법상 거주 요건 때문에 빈집을 활용한 민박 사업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는 2021년부터 ‘농어촌 빈집 활용 숙박업’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빈집을 활용한 숙박업 운영을 임시로 허용하고 있는데, 이를 정식으로 제도화하겠다는 계획이다. ○법인의 사업 허용은 고민 중정부는 법인에도 농어촌 민박 사업을 허용할지를 놓고선 고민하고 있다. 자칫 대량의 ‘러브호텔’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등 농어촌 난개발 논란이 빚어질 수 있어서다. 각 지자체가 불법 민박을 단속하는 데 역량의 한계가 있다는 점도 고려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지자체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농어촌 민박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95년이다. 농식품부는 농어촌 빈집 문제 해결을 위해 민박 사업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함께 ‘4도 3촌’ 라이프스타일이 퍼지면서 전국의 농어촌 민박 사업장이 꾸준히 늘고 있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농어촌 민박 사업장은 2020년 2만9029개에서 지난해 3만3093개로 3년 새 14.0% 증가했다. 여행객이 흔하게 이용하는 펜션 가운데 상당수가 농어촌 민박 사업장인 경우가 많다.
농식품부는 중장기적으로는 농어촌정비법에서 민박 관련 내용을 아예 떼내 새로 법안을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농어촌정비법의 목적이 농업 생산 기반과 농어촌 생활 환경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만큼 민박 사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새로운 법률이 필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