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가 늘 행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다. “10만 명이 죽었다”며 미술관에 드러누운 예술가 낸 골딘(71)이 존경받는 이유다.
지난 15일 개봉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현대 사진예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거장 낸 골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골딘은 에이즈 환자나 마약 중독자, 매춘부, 성소수자 같은 터부(금기)를 찍었다. 서양의 유명 현대미술관 중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영화는 골딘의 예술적 면모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겪어낸 삶과 투쟁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제7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불쾌한 잔혹동화 같은 세상에 맞서 현실 속에서 아등바등 투쟁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값어치를 지닌다.
영화는 2017년 저항그룹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이란 단체를 결성해 전 세계 미술관을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골딘을 추적해 나간다. 시위의 타깃은 의약품 제조회사 퍼듀파마의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이다. 퍼듀파마가 제조한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골딘은 왜 새클러 가문을 공격했는가. 새클러 가문이 ‘죽음의 약’으로 벌어들인 돈을 대형 미술관들에 쏟아부으며 예술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골딘은 전 세계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자선을 빙자해 피 묻은 돈을 세탁하는 새클러 가문을 용납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결국 런던 국립초상화갤러리를 시작으로 테이트모던, 파리 루브르, 뉴욕 구겐하임 등이 새클러가의 기부금을 사절하기로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7개 전시 공간에 새겨진 새클러의 이름을 지웠다.
미국을 발칵 뒤집은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로 오스카를 거머쥔 로라 포이트러스의 연출은 영화에 몰입도를 더한다. 사진에 빠지고, 마약과 동성애를 일삼고, 돈을 벌기 위해 매춘까지 했던 골딘의 혼란한 과거와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고결한 현재를 병치하는 구조를 통해 그의 무모한 투쟁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인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전기, 엘레지, 탐사보도를 매끄럽게 결합하는 경이”라는 외신의 평가는 꽤 적절하다.
데이비드 암스트롱, 필립 로르카 디코르시아,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 쿠키 뮬러 등 1980년대 미국 예술을 꽃피웠던 작가, 영화배우와 이들을 담은 골딘의 사진을 보는 재미도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122분.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