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사람은 일하고 밥을 먹는 존재다

입력 2024-05-21 18:12
수정 2024-05-22 00:02

무명의 문학청년으로 무위도식하던 젊은 날 내 꿈은 평생 일하지 않고 사는 것이었다. 책을 쌓아놓고 종일 빈둥거리는 것, 평생 완벽하게 노동의 면제를 받는 삶, 그게 내 버킷리스트였다. 이따위 철없고 한심한 망상에 빠져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뒤적이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대는 승리한 자, 자기를 극복한 자, 감각의 지배자, 그대는 여러 가지 덕의 주인인가?”(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혼과 아이를 갈망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그런 의례를 건너뛴 채 결혼에 뛰어들었다. 나는 감각의 지배자는커녕 자기 한계에 갇힌 채 허덕이는 패배자 주제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 무모하고 어리석은 자에게 재앙을! 그 결정이 초래할 곤란 따위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한 나는 그저 인격이 여물지 못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뜨거운 자기성찰의 시 한 편 한 가정을 꾸리는 가장은 누구나 호구지책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 나는 달라이 라마도, 워런 버핏도 아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소규모 살림을 꾸리는 자에게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다.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출근을 위해 만원 버스를 탔다. 나는 등에 무거운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 같은 제 처지를 돌아보며 자기 모멸감 속에서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곱씹곤 했다. 정해진 날짜에 월급을 받을 때만 아주 잠깐 한 줌의 보람과 긍지를 되찾았을 수 있었다.

출근과 퇴근을 되풀이하는 게 타성으로 굳어지자 여러 갈등과 번민이 내면에 생겨났다. 자유에의 욕구가 꿈틀댔지만 자유로 나아가는 길은 막막했다. 나는 한 집안의 어른이고, 희망의 빛이요 구원의 밧줄 같은 존재라는 자긍심은 이내 사라지고, 나의 시간을 임금노동과 맞바꾸며 사는 일의 고통과 지겨움을 마주해야만 했다. 직장에 매인 대신 글 쓸 기회를 놓쳤고, 그 상실은 상처가 됐다.

개구리 떼가 개굴개굴 울어대는 진흙 늪에 몸을 담그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내 상상력은 찬 잿더미로 변해 좀처럼 타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 안의 창조력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고갈됐을지도 모를 20대 중반에 나는 갑자기 밥을 촉매로 한 현실 인식과 사유의 과정, 맵고 뜨거운 자기성찰을 펼쳐 보인 졸시 한 편을 썼다. 깨끗한 밥은 어떻게 입에 오는가“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밥’, <완전주의자의 꿈>, 1981)

가족 부양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며 느낀 삶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호구지책을 위해 몸을 갈아 넣어야만 했다. 자주 지쳤다. 책 읽기와 고전음악, 시 쓰기밖에 모르던 청년의 순결한 의식을 지닌 채 온몸을 던져 쿵, 하고 부딪친 밥벌이의 고단함과 숭고함을 깨닫지 못해 그저 사는 것이 치욕스럽고 비정하구나 했다. 이 시에 깔린 도저한 부정성은 밥이 아니라 굴욕감에 빠뜨리는 현실을 향한 것이다. 나를 비천한 노동 따위에 팔아넘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밥 앞에서 느낀 날것의 고뇌와 수치심은 내 깜냥 안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순진하고(혹은 어리숙하고) 치열했던가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밥을 구하려고 취직을 하고 일하며 굴욕을 당하거나 흉중에서 타오르는 한 줌의 말을 파기하고 괴로워했을 테다. 밥 한 그릇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누추해지고 너덜너덜해지는 일은 현실에서 드물지 않다. 가장 깨끗한 밥은 어떻게 내 입에 오던가? 밥이 입에 도달하는 과정의 도덕적 정당성을 깐깐하게 따지는 시의 문면을 뾰족하게 뚫고 나오는 죄의식은 통렬했다. 감동적인 밥벌이의 숭고함이여한참 뒤 일에서 배제된 영혼은 자학에 빠지거나 쉽게 부패한다는 걸 깨쳤다. 일은 우리 내면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힘의 작동, 최초의 움직임 동시에 새로운 권리인 것을! 강제나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로 자신의 일을 수납해야 한다. 그런 건강한 의식 속에서 일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고 선언할 수 있다.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새로운 힘이자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인가? 그대는 강제로 별들이 그대의 주위를 돌게끔 할 수도 있는가?” (니체, 앞의 책) 일이 신성한 의미를 짓는 수단이 되지 못한 채 의무로 누추해지는 순간 보람은 사라지고 삶은 볼품없게 쪼그라든다.

사람은 일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 가장 이상적인 일이란 기쁨과 보람 속에서 존재 증명이고,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테다. 아울러 일이 나만의 은신처에서 빈둥거림을 박차고 나와 세계로 나가는 항해라면 그것은 고립을 떨치고 나와 사회공동체와 연결되는 방식이고, 자신을 의미의 존재로 빚는 유력한 수단이다.

날마다 서울로 출근하려고 일산, 김포, 군포, 광주, 하남, 파주, 인천, 수원 같은 근교 도시에서 나와 출근 전쟁을 치르는 이들을 나는 무심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그때마다 나는 새삼 사람이 밥을 먹고 일하는 존재라는 것을, 밥벌이의 괴로움과 숭고함을 소스라치게 깨달으며 감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