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가 ‘정글’이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그나마 최근까지는 자유 시장경제의 원칙이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이 원칙을 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주변국과 국민에게 설명할 명분을 만들고, 자국의 관련 법령을 수정하는 등의 절차를 차근차근 밟았다. 힘 있는 선진국들도 ‘공정한 국가’라는 이미지는 지키고 싶어 했다는 얘기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빅2’로 부상하고, 세계 경제가 인공지능(AI) 등 신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각국 정부는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명분을 쌓는 절차를 건너뛰는 사례가 부쩍 늘었고, 조치의 강도도 세졌다. 거친 정글이 된 국제사회무역장벽을 쌓고 차별적인 보조금을 살포하는 것은 기본이다. 미국 정부가 사전 예고 없이 중국산 전기차와 철강재 등에 부과했던 관세를 2~4배 올리기로 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자국 경제에 위협이 되는 해외 기업을 퇴출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최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중국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매각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이른바 ‘틱톡 퇴출 법안’에 서명했다.
일본 정부가 라인야후에 자본 재검토를 요구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국가 기간 서비스 역할을 하는 메신저 라인의 보안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한국 기업인 네이버를 일본에서 퇴출하고 싶다는 게 일본의 본심이다. 라인야후는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함께 만든 회사로 일본에서 메신저와 전자결제, 원격의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의 장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는 바뀐 게 없어 보인다. 소비자 개인정보 수집, 통신망 사용료 부과 등과 관련해 글로벌 빅테크는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면서 우리 기업에만 엄한 기준을 적용한다. 관련 업계에서 ‘방구석 여포’(자신이 익숙한 공간에서만 위풍당당한 사람을 비꼬는 은어)라는 볼멘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배경이다. 우리는 자국 기업에만 엄해국내 기업에 적용되는 규제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6일 네이버 카카오 등 대형 플랫폼의 독과점을 규제하는 ‘플랫폼법’ 제정을 재추진한다고 밝혔다. AI 분야에선 주요 부처의 ‘규제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창이다. AI 분야 헌법에 해당하는 ‘AI 기본법’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자체 법령과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이다.
경제외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라인야후 사태가 단적인 예다. 우리 정부는 네이버를 겨냥한 1차 행정지도(3월 5일)가 나왔을 때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2차 행정지도(4월 16일)가 나오고 나서야 대응을 시작했다. 정부가 강경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쏟아진 5월 중순 이후다.
역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버틴 우리 기업이지만, 최근 들어 글로벌 경쟁력이 빠르게 떨어지는 모습이다. 특히 미래의 전장인 AI 분야에선 빅테크와 비교가 어려울 만큼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방구석 여포’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