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의 노래를 함께 따라부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연대한다'
무대 뒤편 커다란 스크린에 위 문구가 띄워지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밴드 실리카겔(김건재, 김한주, 김춘추, 최웅희)의 단독 콘서트에는 아티스트와 관객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존재했다. 일일이 눈맞춤 하지 않고, 손을 맞잡지도 않지만 음악을 매개로 강력한 '연대의 힘'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청각적 쾌감, 농도 짙은 음악적 진정성, 투명한 진심 등이 정해진 모양 없이 얼기설기 얽힌 '실리카겔의 나라'. 불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느슨한 매듭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세계는 단단해졌다.
실리카겔은 17~2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공연 '신서사이즈 3(Syn. THE. Size 3)'을 개최했다. 약 3일간 동원한 관객 수는 1만2600명. 커진 공연장 규모는 무서울 정도로 높아지는 이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 벨로주 홍대, 롤링홀 등에서 공연해온 실리카겔은 지난해 예스24라이브홀,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 공연한 데 이어 장충체육관까지 가득 채웠다.
객석은 스탠딩 구역은 물론 지정석까지 꽉 찼다. 무대 위로 핀 조명이 떨어지고 기타를 멘 김춘추가 무대에 오르자 기대 섞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첫 곡은 김춘추가 홀로 연주하며 부르는 'PH-1004'. 미니멀한 구성에 레트로한 무드가 매력적인 이 곡은 정규 2집의 마지막 트랙으로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아웃트로'로 꼽히는 곡인데, 오프닝 첫 곡으로 배치한 점이 신선했다. 공연을 함께하는 스태프들의 이름이 적힌 크레딧이 이 곡과 함께 초반에 올라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오프닝은 관객들의 주목도가 가장 높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관객들의 떼창이 공연장을 감싸자 김한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데저트 이글(Desert Eagle)', '온 블랙(On Black)', '에레스 투(Eres Tu)', '눈동자', '고산(Gosan)', '임모탈(IM'MORTAL)'까지 명곡의 향연이 이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에 취해 손과 발의 힘이 쫙 빠질 때면 그 틈을 비집고 시원한 밴드 사운드가 치고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끝에 오는 알 수 없는 개운함. 귓가를 때리는 짜릿한 합주 안에서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각 악기가 뚜렷하게, 상당히 입체적으로 소리를 냈다.
음악과 어우러진 조명, 영상은 무대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장치였다. 조명은 때론 가볍고 유연하게, 때론 날카롭고 화려하게 변모하며 사운드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그려냈다. 네 멤버 뒤로 펼쳐진 아이코닉한 미디어 아트는 음악의 질감을 배가하고, 관객들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질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하나의 신(新)예술이었다.
이번 공연의 타이틀 '신서사이즈'는 '합성'을 뜻하는 영어다. 관객과 소통하는 것을 넘어 서로 '합성'해 하나가 되겠다는, 음악으로 두 개의 마음을 오롯이 결합하겠다는 각오가 담겼다. 미디어 아트에 포함된 문구는 사전에 관객들이 쓴 글을 발췌한 것들이다. 김한주는 "여러분과 우리의 합성"이라고 강조하며 "소중한 시간이지 않냐. 이 소중한 시간을 우리끼리 즐겨보자"면서 앙코르 전까지 사진 및 영상 촬영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오프닝을 거쳐 실리카겔의 음악이 은근하게 핏줄을 타고 들어왔다면, 본격적으로 그 힘이 뇌를 깨우기 시작했다. '리얼라이즈(Realize)'가 시작되자 관객들은 일제히 손을 머리 위로 힘껏 들어 올렸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크린에 띄워진 메시지는 불완전성, 불안, 용기와 극복, 자유, 음악과 위로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떠한 잡념도, 고민도, 위기도, 아픔도 떠오르지 않는 음악만이 있는 세계에서 피어난 '연대 의식'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강력하고 단단했다.
감탄을 연발하게 되는 연주는 실리카겔의 무기 중 하나다. 'APEX'에서는 김건재의 화려한 드럼 솔로가 관객들의 혼을 쏙 빼앗았다. 곡 말미 질주마처럼 달리는 드럼 연주에 관객들 감탄을 쏟아냈고, 무대가 끝나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김건재'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렁찬 환호와 떼창으로 시작한 '틱택톡(Tik Tak Tok)' 무대에서는 김춘추의 현란한 기타 솔로가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았다. '노 페인(NO PAIN)' 무대 전에는 김한주의 클래식 피아노 독주가 펼쳐졌다. 차분하게 흐르기 시작한 선율은 이내 다채로운 구성으로 변화하며 마치 귀로 듣는 한 편의 영화를 눈앞에 펼쳐놓는 듯했다.
혼신에 연주에 힘입어 관객들은 제대로 공연에 스며들었다. 앙코르 전 마지막 곡 '앙드레 99(Andre 99)' 무대를 할 때는 객석에서 휴대폰 불빛이 일렁였다.
실리카겔이 왜 현재 가장 '핫'한 밴드로 꼽히는지 몸소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인 150분이었다. 아이돌 위주로 재편된 최근의 음악 시장에서 실리카겔은 메말라가는 '록 스피릿'을 한가득 채워주고 있다. 록과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혼합해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선보이는 이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묘한 해방감을 주다가도 귀를 찌를 듯한 강렬한 연주로 절정의 쾌감을 안기는 '알다가도 모를' 매력을 지녔다. 음악의 놀라운 완성도를 넘어 음악을 향한 진심이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전달됐다.
실리카겔의 음악적 색깔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데, 공연을 보고 나면 더더욱 이들을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자유로운 청각적 플레이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뿐. 실리카겔이 이렇게 계속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주길 바랄 뿐.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