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 바오안 신(新)중심구에 있는 거린메이 본사. 지난달 말 방문한 이곳은 대기업 본사가 아니라 대학 캠퍼스 같았다. 전구체와 배터리 재활용 기술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는 거린메이 연구개발(R&D)센터 앞에는 폐전기차 등을 재활용해 만든 로봇이 방문객을 반겼다.
연구소 안에 들어가니 각종 첨단 엑스레이와 스캔장비, 전자현미경이 눈에 들어왔다. 판화 거린메이 부사장은 “거린메이는 차세대 배터리를 연구하기 위해 세계적인 석학만 40여 명을 끌어모았다”며 “작년엔 순쉐량 캐나다 온타리오대학 교수가 합류했다”고 소개했다. 중국계 캐나다인인 순 교수는 전고체 배터리에 들어가는 고체 핼라이드 전해질 분야의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중국 전구체 업체들의 진화중국이 배터리 양극재 제조 원가의 70%가량을 차지하는 전구체의 메카가 된 배경에는 환경오염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리튬, 코발트 등을 고온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 수질 오염을 피할 수 없어서다. 배터리셀 제조 공장을 잇따라 끌어들인 미국이 전구체 공장 유치에 미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환경 문제에 관대한 중국이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 거린메이, CNGR 등 세계적인 전구체 기업들이 중국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배터리 산업에서 전구체가 중요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배터리를 개발해도, 상용화하려면 전구체 업체에 양극 활물질에 관한 ‘레시피’를 전달해야 한다. 설계 도면을 보여줘야 배터리셀 및 양극재 제조사가 원하는 전구체를 만들 수 있어서다. 중국 전구체 업체들이 전세계 배터리 설계도를 갖게 된 이유다.
중국 기업은 이제 자체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거린메이가 전구체 업체론 이례적으로 지난해 매출 305억위안(약 5조7286억원)의 5%가량인 14억5000만위안(약 2750억원)을 R&D에 투입한 이유다. 판 부사장은 “배터리 관련 특허 3700건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거린메이는 선전 본사를 비롯해 우한, 타이싱 등 중국 전역에 연구소를 6개나 운영하고 있다. 리튬 등 광산이 밀집해 있는 인도네시아에도 하나 뒀다. R&D 인력만 1600명에 달한다. 판 부사장은 “R&D 인력을 우수인재, 부서를 이끄는 인재, 첨단 인재로 나눠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거린메이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쉬카이화 회장도 중난대 연구원 출신이다. ○차세대 배터리 연구의 중심거린메이가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는 35개에 달한다. 장쿤 우한연구소장이 설명한 프로젝트는 하나같이 ‘전인미답’의 기술이다. 배터리 내부의 활성 물질을 보호하기 위한 ‘배터리 코어셸 보호막’ 기술, 리튬이온배터리 양극 소재 개발에 관한 최신 기술로 꼽히는 ‘4차 울트라 하이니켈 전구체’, 배터리의 전압 범위를 넓히는 ‘2세대 고전압 전구체’ 기술 등이 그렇다.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기업들도 상용화하지 못한 기술들이다.
장 소장은 “거린메이가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R&D에 매달린 덕분”이라며 “전구체를 생산할 때 분포 황산을 이용하는 거린메이만의 독특한 기술 덕분에 경쟁사보다 싸게 전구체를 제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린메이의 ‘전구체 천하통일’ 계획에는 한국도 포함됐다. 지난해 SK온, 에코프로와 손잡고 새만금에 전구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다음 목표는 리사이클링 산업거린메이가 노리는 또 다른 분야는 폐배터리 시장이다. 거린메이는 우한 등지에 30만t 규모의 폐배터리 처리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20년 중국에서 폐기된 리튬이온배터리 양만 50만t에 달한다. 거린메이 관계자는 “최근 2년간 폐배터리 처리 실적이 매년 두 배씩 늘어나고 있다”며 “전기차가 폐차장에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오는 5~10년 뒤엔 확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배터리 재활용 의무를 생산업체에 지운 건 2018년이다. 생애 주기를 추적하는 시스템에 등록해 관련 데이터를 정부 당국과 공유하도록 했다. 마치 축산물처럼 생산부터 폐기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이력제를 6~7년째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화된 일련번호를 배터리 하나하나에 부여해 관련 정보를 쉽게 해독할 수 있도록 해놨다. 강진수 서울대 에너지공학부 교수는 “폐배터리는 수요가 폭증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로 전환할 수 있다”며 “한국도 갈수록 커지는 폐배터리 시장을 놓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선전·우한=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