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국 정부는 '2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대폭 수정하며 '대약진운동'의 상처를 극복해냈습니다. 1961년과 1962년, 산업 생산 가치가 두 배 증가하고 농업 생산은 35% 늘어났으며 철강 생산량도 껑충 뛰었습니다.
다만 경제적 성과는 당시 공산당 지도층에게 우려를 가져다줬습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며 이데올로기에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의 배경은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 내 이데올로기 변화를 막기 위해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습니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이어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은 '십년 동란'(十年動亂, 십년의 혼란)으로도 불립니다.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는 "전근대적 문화와 시장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라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실제로는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대약진운동 실패 후 권력에서 밀려난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들을 동원해 이른바 시장 회생파를 탄압하며 권력 투쟁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파와 덩샤오핑파 사이의 갈등은 격화됐습니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16일 시작됐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공산당과 중국 사회 내에 만연한 부르주아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사상적 정화 작업은 주로 학생과 홍위병의 활동을 통해 진행됐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운동이 소련의 수정주의를 막고, 중국이 이상적인 공산국가로 전환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한 국가가 스스로 자국의 문화유산을 파괴한 사건입니다. 근대 이후 극히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과 함께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폭력성과 경직성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중국의 수많은 문화재와 지식인 계층이 큰 피해를 봤으며, 특히 공자가 모셔진 공묘와 동아시아에서 신격화된 관우의 묘와 같은 중요 문화 유산들이 파괴됐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최소 수십만에서 최대 20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이징의 '붉은 8월', 광시 대학살, 내몽골 사건, 광동 대학살 등 중국 전역에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외에서 국가적 재난으로 평가되며,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마오의 심대한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린뱌오와 사인방을 주요 책임자로 지목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문화'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조합됐지만 서양의 '르네상스'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철저히 파괴한 극단적인 반문화적 행태였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