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분석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풀베팅’합니다. 손실 날 일이 없거든요.”
최근 만난 한 자산운용사 대표의 말이다. 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올해 공모주는 상장 첫날 단 한 번도 공모가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상장 첫날 매도하고 떠나면 무조건 수익이 난다.
이런 이유로 기업공개(IPO) 수요예측에는 매일매일 기관투자가가 몰려들고 있다. 지난해 말 2000여 곳이었던 수요예측 참여 기관 수는 이달 2200여 곳으로 불었다. 공모주가 뜨자 갑자기 늘어난 이들이 정상적인 기관투자가일 가능성은 작다. 이른바 ‘쩐주’들이 운용하는 1인 투자사가 상당수다. ‘무늬만 기관’들이다. 여기에 올해부터 공모주 우선 배정 물량이 10%로 증가한 하이일드펀드를 비롯해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로 갈 곳 잃은 부동산 전문 운용사까지 공모주 시장에 들어왔다. 이렇게 폭증한 기관들이 수요예측에 참여해 ‘묻지마 베팅’을 하니 공모주 가격이 제대로 형성될 리 없다.
올해 HD현대마린솔루션을 제외한 모든 새내기 기업의 공모가가 희망 공모가 범위 상단을 초과했다. 22개 기업은 희망 공모가 상단보다 평균 20% 인상해 공모가를 책정했다. 공모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가격 왜곡 현상이 더 커졌다. 공모 규모 198억원인 오상헬스케어는 공모가 상단보다 가격을 33%나 올렸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풀베팅’을 해야 공모주를 1주라도 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은 뒤늦게 수요예측 제도 개선에 뛰어들었다.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의 ‘묻지마 베팅’을 막기 위한 수요예측 제도 개선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달 초 열린 간담회에서는 1인 운용사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 등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의 수요예측 제도 개선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4월 IPO 허수성 청약 방지를 위해 주금납입 능력을 확인하는 등 수요예측 제도 개선 사항을 발표해 7월부터 시행했다. 자산운용사가 증권사에 자산총계 등에 대한 확약서를 제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에도 기관투자가의 ‘묻지마 베팅’은 식지 않고 있다. 허수성 청약 방지 제도가 도입된 뒤 기관 수요예측 경쟁률은 평균 1500 대 1에서 지난해 말 700 대 1까지 하락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1000 대 1 수준을 회복했다.
상장 직후 공모가 대비 높은 수준에 주가가 형성됐다가 급락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이어지는 것은 최근 공모주 가격 결정 방식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준다. 그 피해자는 결국 개인투자자들이다. 금융당국이 이번에 내놓는 IPO 개선안을 통해 그릇된 수요예측 방식과 공모주 청약 방법, 청약 관행 등을 제대로 손볼 수 있을지 개인투자자들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