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음악 신동이라고 해서 모두 거장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기본기와 독보적 음악성, 작품을 해석하는 탁월한 시선을 갖춰야만 나이가 들어도 치열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살아남는다. 어릴 때부터 ‘비르투오소(virtuoso·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로 주목받은 영재라면 성장하는 시간은 더 혹독하다. ‘기계 같은 연주’ ‘모범생 같은 연주’ 등 선입견에 갇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45)은 천재 연주자를 둘러싼 세간의 걱정거리를 떨쳐버리고 ‘21세기 바이올린 여제(女帝)’로 올라선 인물이다. 10대 때부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뉴욕 필하모닉 등 명문 악단의 솔리스트로 발탁되면서 출중한 연주력을 증명했다. 성인이 되고는 그래미상 세 차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상, 에이버리 피셔상 등을 잇따라 품에 안으면서 작품에 대한 깊은 탐구력, 빼어난 표현력까지 갖춘 진정한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지난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힐러리 한 리사이틀은 ‘명불허전’을 입증한 100분짜리 무대였다. 그는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와 함께 ‘역사상 가장 완벽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불리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1~3번)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첫 곡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비의 노래’. 힐러리 한은 깨끗하고 명료한 음색과 밀도 있는 보잉(활 긋기)으로 비 오는 날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쓸쓸한 악상을 읊어냈다. 현에 가하는 장력, 보잉 속도, 비브라토 폭 등을 정교하게 조절하면서 작품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풀어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리듬, 셈여림, 강세 변화는 시종일관 선명하게 조형됐다. 연주 초반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율이 어긋나는 구간이 더러 들렸지만 점차 서로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음량은 물론 리듬 표현, 음향적 질감, 연주 속도 등 선율에 담아내고자 하는 요소가 긴밀히 맞물려 안정된 앙상블을 보여줬다.
다음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2번. 힐러리 한이 활을 다루는 솜씨는 과연 거장다웠다. 연주 내내 활을 곧게 밀고 당기며 모든 음표의 소리를 끝까지 채워냈는데, 조금의 남용도 허용하지 않는 매끄러운 음질과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유연한 프레이징이 풍만한 양감을 선사했다.
마지막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하게 4악장으로 구성돼 장대한 교향곡 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힐러리 한은 주제 선율에선 활을 악기에 완전히 밀착시켜 묵직한 음색으로 붉은 화염을 세차게 뿜어내듯 강하게 브람스의 열정을 토해냈고, 감미로운 브리지 구간에선 마치 한 줄의 활 털만 이용해 아주 얇은 소리를 뽑아내듯 처연한 색채로 브람스의 정취를 불러냈다.
4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의 음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격렬하게 대립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쏟아지는 음표의 파도에서도 긴 호흡과 강한 터치, 정돈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기법)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정제된 음색과 제한된 음량으로 음향의 움직임을 잡아두다가도 돌연 몸에 반동이 생길 정도로 세게 활을 내려치면서 공연장 천장까지 울림을 퍼뜨리는 힐러리 한과 묵직한 타건으로 격정적인 선율을 뿜어내는 해플리거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불꽃 같은 에너지는 청중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와 비견될 만한 연주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 세계적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힐러리 한을 향해 남긴 찬사다. 이날 공연도 그랬다. 힐러리 한이 30여 년 쌓아온 ‘여제의 품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김수현 기자
힐러리 한을 집중 분석한 기획 기사는 5월 27일 창간하는 문화예술 전문잡지 ‘아르떼’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