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영수회담'이 일깨운 우리말 몇 가지

입력 2024-05-13 10:00
수정 2024-05-13 15:38

지난달 29일 윤석열 정부 들어 첫 영수회담이 열렸다. 영수회담의 어근이라 할 수 있는 ‘영수’는 흔히 쓰는 일상의 말은 아니다. 그런 만큼 우리말 관련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쏟아냈다. ‘영수(領袖)’의 사전적 풀이는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다(<표준국어대사전>). <연세 한국어사전>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었다. “정당이나 큰 집단의 우두머리”가 그 의미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여기에 ”옷깃과 소매”라는 또 하나의 풀이를 더했다. 이 풀이를 주목해야 한다. 영수가 ‘우두머리’란 의미를 지니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대통령과 영부인, ‘령’ 자 서로 달라<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영수회담’을 “한 나라에서 여당과 야당 총재 간의 회담”으로 풀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 어법과 좀 다르다. 우리는 지금 영수회담을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 간의 회담’으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전에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던 시절엔 영수회담이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의 만남을 가리키는 말로 적합했다. 지금은 대통령은 당무에서 분리돼 여당 대표가 따로 있기 때문에 이런 풀이가 적절한지 논란이 있다. 반면에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당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영수회담이 맞다는 주장도 있다.

영수는 ‘옷깃 령(領)+소매 수(袖)’의 결합으로 이뤄졌다. 이 말이 어떻게 우두머리란 뜻을 나타내게 됐을까? 우선 ‘령(領)’은 ‘우두머리 령(令)+머리 혈(頁)’이 합쳐진 글자로, ‘다스리다, 거느리다’란 뜻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원래는 머리와 맞닿은 목 부분을 둘러댄 옷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옷깃은 자연스레 옷의 중심이 되고, 여기서 의미가 확대돼 ‘지도자, 거느리다, 다스리다’라는 뜻이 나왔다. ‘대통령(大統領)’의 ‘령’에 이 글자가 쓰였다. 직역하면 통령, 즉 한 집단을 거느린 우두머리에 ‘대(大)’ 자를 붙였으니 ‘최고 우두머리’인 셈이다. 일본에서 19세기 개화기 때 영어의 ‘president’를 번역하면서 만든 말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의 ‘령(領)’과 영부인 할 때의 ‘영(令)’이 다른 글자라는 점도 놓치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이를 같은 글자인 줄 알고 영부인이라고 하면 그저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다. 영부인에서의 ‘영’은 ‘우두머리 령(令)’ 자이다. 이게 머리글자로 올 때 ‘영’으로 바뀌는 것은 우리말의 두음법칙에 따른 것이다. 이 글자는 주로 ‘명령하다’나 ‘법령·규칙’ 따위를 가리키지만, 경칭의 의미도 나타내 남의 가족을 높여 부르는 말에 쓰인다. 영부인이니 영애, 영식 같은 말이 그렇게 나왔다.공직자, ‘청풍양수(淸風兩袖)’ 새겨야‘영부인(令夫人)’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대통령뿐 아니라 모든 남의 아내에게 쓸 수 있다. 가령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을 때 짐짓 “영부인께서는 잘 계신가” 하고 묻기도 한다. ‘영애(令愛)’는 ‘영양(令孃)’이라고도 하는데,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영식(令息)’은 윗사람의 아들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모두 의례적이고 격식을 차린 말투에 쓰인다는 점에서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고급 어휘’인 셈이다.

영수의 ‘수’는 ‘소매 수(袖)’ 자다. 한복에서 소매는 옷깃 못지않게 중요했다. 주머니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전통 한복에서는 간단한 소지품을 저고리 소매에다 넣었다. 이곳을 넓게 만들어 손을 감추기도 하고 물건을 넣어 간수하기도 했다. 어떤 일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수수방관(袖手傍觀)’이 ‘소매 수’ 자를 활용한 말이다. ‘수수(袖手)’란 손을 소매에 넣은 것이니, 수수방관이라 하면 곧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뜻이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이 비슷한 말로,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함’이란 뜻이다. ‘옷깃 령’ 자와 ‘소매 수’ 자가 결합한 ‘영수’는 이렇게 우두머리란 뜻을 나타내게 됐다.

‘소매 수’ 자가 쓰인 말 가운데 ‘청풍양수(淸風兩袖)’는 고금을 통틀어 새겨둘 만하다. ‘두 소매 안에 맑은 바람만 있다’라는 뜻이다. 청렴한 관리를 비유한다. 이 말은 은유 구조로 돼 있어 깊은 의미적 멋들어짐이 배어 있다. 비록 중국 고사에서 온 말이지만, 조상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고 오늘날에도 공직자가 늘 가슴에 품어 새겨야 할 말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