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전시회 여는 '자폐 스펙트럼' 작가 한부열 "희망을 나누고 싶어"

입력 2024-05-13 10:20
수정 2024-05-13 10:23


30㎝ 자를 따라 검은색 사인펜이 도화지를 가로지른다. 어떠한 밑그림도 없는 거침없는 펜선으로 6명의 인물화가 태어난다. 입술을 칠할 무렵, 그림을 그리던 한부열 작가(39)가 잠시 멈칫한다. 왼쪽부터 오른쪽 인물 순서로 색칠하는 본인만의 '루틴'이 깨진 것이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한 작가는 작품을 완성한 뒤 환히 웃으며 그림을 들어 올렸다. "부열이 그림. 잘했어요."

8일 서울 이촌동 노들갤러리에서 열린 한부열 작가의 개인전은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작가의 서번트증후군이 한 가지다. 3세 때 자폐스펙트럼을 진단받은 한부열 작가는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예술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다른 하나는 '개인전'이 아니란 것.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열린 그의 전시는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 등 도움의 손길로 완성된 '가족전(展)'이다.



이번 전시에는 30㎝ 자와 펜,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작품 30여점이 걸렸다. 커다란 콧구멍과 크고 맑은 눈, 특유의 밝은 색채로 그린 그의 인물화는 입체파 거장 피카소의 작품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 이름 모를 아줌마와 아저씨 등 작가를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이 '따로 또 같이'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어린 시절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은 한부열 작가에겐 또래 친구가 없다. 대신 이웃과 부모의 지인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주변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기억은 '아파트 사람들' '하늘봐요' '함께가요' 등 인물화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작품에는 '술마시고노래해요'란 제목을 붙였는데, 부모의 지인과 함께 보낸 행복한 저녁 식사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6세 무렵이다. 눈에 비치는 혼란스러운 이미지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시달릴 때마다 붓을 들며 안정감을 느꼈다. 작가한테 그림은 예술을 넘어 일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거창한 주제가 아닌 친숙한 사물이 주를 이룬다. 빠삐코와 메로나, 쿠크다스 등 작가의 소박한 취향이 담긴 '내가좋아하는것들'(2022)도 그중 하나다.

자를 이용하기 시작한 건 자폐스펙트럼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오와 열에 대한 강박이 작용한 결과다. 유화 물감이 마르는 시간을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성격 탓에 빨리 마르는 아크릴물감을 주로 사용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 없는 작가의 이력은 독특한 작품세계의 토양이 됐다. 그의 작품은 인물의 중첩과 사물의 의인화, 앞뒤를 동시에 표현하는 입체 평면 등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한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은 "작업 과정의 시작은 즉흥적이고 직관적이지만, 마무리 단계에선 철저하게 이성적인 치밀함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림 자체보다 '장애를 극복한 화가'란 수식어가 앞서는 게 탐탁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한 작가는 발달장애인 최초 한국미술협회 정회원이다. 30차례 개인전을 열고 아트페어에 16번 참가한 프로 작가다. 경기 남양주에 그의 이름을 건 '갤러리HBY(한부열)'를 열고 장애 작가를 위한 전시 공간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온 가족이 앞치마를 두르고 모여 앉는 데서 시작한다. 작품을 그리는 건 작가지만, 펜과 물감을 고르기부터 뒷정리까지 부수적인 노동은 오롯이 가족의 몫이다. 어버이날에 열린 이번 전시에 '가족의 손길로 빚은 예술'이란 제목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작가가 재능을 꽃피운 배경엔 JW중외제약이 있었다. 고(故) 이종호 JW 명예회장이 설립한 JW이종호재단은 2003년부터 10여년간 중증 지적장애인으로 구성된 '영혼의 소리로' 합창단을 후원했고, 2015년 JW아트어워즈를 설립하는 등 장애 예술인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6년 한부열 작가의 JW아트어워즈 최우수상 수상을 계기로 마련됐다. 8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경하 JW중외제약 회장은 "장애 예술인이 단지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문화예술로 사회에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한부열 작가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린 '고래'(2023) '눈싸움'(2024) 등 신작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를 방증한다. 장애 작가라는 수식어, 30㎝ 자 안에 갇혀있던 강박을 넘어 한층 도약하겠다는 의미일까.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따뜻한 희망을 나누는 작가"라고 답했다. 전시는 15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