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줄이 두 배 길 때도 있습니다.”
지난 4일 오후 7시 30분께 찾은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터미널(호남선). 1층의 한 로또 판매점 앞에 30m 넘는 장사진이 쳐졌다. ‘로또 명당’으로 입소문 난 이곳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줄 뒤편에 자리 잡은 이들은 행여나 로또 판매 종료(토요일 오후 8시) 전까지 복권을 사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자기 차례가 몇 번째인지 세려고 줄 앞쪽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근처 카페의 한 아르바이트생은 “연휴 첫날이라 터미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어 그나마 줄이 짧은 편”이라며 “전국에서 온 터미널 승객들이 호기심에 한 번씩 들르는 것 같다”고 했다.
복권 판매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5일 복권 수탁사업자인 동행복권에 따르면 복권 판매액은 지난해 역대 최대인 6조7507억원을 기록했다. 2018년(4조3848억원)과 비교하면 5년 새 54.0% 급증한 금액이다. 일각에서 “‘세수 펑크’에 시달리는 기재부에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다.
이 같은 추세에 맞춰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는 내년 복권 예상 판매액을 7조6879억원으로 하는 ‘2025년도 복권발행계획안’을 지난달 30일 의결했다. 이는 올해 판매 예상액(7조2918억원) 대비 3961억원(5.4%) 증가한 금액이다. 기재부 복권위는 최근 3년간(2022~2024년) 연평균 증가율을 고려해 판매액을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불황엔 오히려 복권 덜 팔려...'로또 명당'은 인과관계 뒤바뀐 것복권 판매는 늘고 있지만 복권을 둘러싼 오해도 풀리지 않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복권이 많이 팔린다”는 통념이 대표적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당시 복권매출액은 전년 대비 12.4% 감소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8년에도 0.6% 증가하는 데 그쳤다. 최근 10년(2014~2023년) 가운데 국내총생산(GDP)이 역성장한 2020년(-0.7%)에 온라인복권 판매액은 전년 대비 9.7%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기저효과가 컸던 2021년을 제외하고 GDP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2014년(3.2%)의 온라인복권 판매 증가율도 9.5%에 달했다. 복권은 경기가 불황일 때 저렴하면서도 심리적 만족을 주는 상품이 많이 팔린다는 ‘립스틱 효과’와 별 관계가 없다는 분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권 판매액은 ‘신상품’이 출시될 때 크게 뛰었다. 기술 복권과 복지복권이 출시됐던 1993~1994년 복권 매출액은 각각 전년 대비 35.3%와 44.0%씩 증가했다. 2002년 12월 로또 복권이 출시되자 이듬해 복권 판매액은 전년 대비 332.0% 늘었다.
복권업계에선 ‘로또 명당’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 단언한다. 명당이라서 당첨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판매량이 많아서 당첨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올 뿐이라는 설명이다. 동행복권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 판매점별 평균 판매금액은 약 6억원이었는데, ‘로또 명당’으로 소문난 곳은 1주에도 4억원이 넘는 판매 수입을 거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동 복권보다 자동 복권이 유리하다는 편견도 사실과 다르다. 지난해 로또복권의 구매유형별 비중은 자동(67%), 수동(29%), 반자동(4%) 순이었는데, 실제 1등 당첨자 비중도 자동(72%) 수동(24%) 반자동(4%)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복권 당첨되면 회사 그만둔다” 직장인 푸념 진짜였네최근 복권 판매액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인구학적으로는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면서 직장인들의 ‘한풀이’가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동행복권에 따르면 연간 로또 구매 경험 비율은 해마다 30~50대에서 높고 20대와 60대 이상에선 낮은 경향을 보인다. 지난해에도 로또 구매 경험 비율은 60대 이상(51.7%)과 19~29세(54.8%)에선 50%대였던 반면 30대(71.7%)와 40대(61.8%), 50대(66.5%)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문제는 이들 30~50대 ‘주 구매층’이 늘었다는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경제활동인구는 2014년 2683만6000명에서 지난해 2920만3000명으로 8.8% 증가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0대엔 복권으로 ‘한방’을 노리기보다 취업이나 이직 같은 현실적인 계층 상승을 기대하고, 60대 이상은 더 이상 계층 상승을 기대할 유인이 적다”며 “월급날만 기다리며 직장 스트레스를 견디는 직장인들이 ‘직장 탈출’을 꿈꾸며 주로 복권을 많이 구입한다”고 했다. “로또 당첨되면 회사 그만둔다”는 직장인들의 푸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경기 불황은 아닐지라도 최근 10년 새 ‘사회 이동성’이 낮아지면서 복권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10년 동안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서울에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계층 이동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복권에 기대는 이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소득 대비 주택가격 배율(PIR)은 수도권 기준 2014년 6.9배에서 2021년 10.1배로 치솟았다. 석 교수는 “암호화폐 투자 열풍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기재부에선 코로나19 당시 다른 사행산업이 위축되면서 복권이 이들 수요를 흡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대표적인 사행산업으로 꼽히는 경마의 매출액도 2018년 7조5376억원에서 2021년 1조476억원으로 급감했다. 2022년 6조3969억원으로 다소 늘어났지만, 여전히 과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카지노업의 매출액도 2018년 3조254억원에서 2021년 1조1800억원까지 줄어들었다 이듬해 1조9380억원을 기록했다.
현장에선 복권 판매의 ‘초단기 요인’으로 ‘날씨’를 꼽기도 한다. 날씨가 좋을수록 유동 인구가 늘면서 우연한 계기로 복권을 구매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기재부 복권위에 따르면 연중 복권판매액은 ‘U자 형태’를 보인다. 회식 자리가 많은 연말연시에 복권판매액이 늘고 휴가철인 여름엔 상대적으로 복권 판매액이 줄어들어서다. 기재부 복권위 관계자는 “지난해 연말 복권 판매액이 예상치를 밑돌았다”며 “궂은 날씨가 많아 복권판매가 줄어들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기준 지난해 11~12월 강수일수는 19일로, 2019년(20일) 이후 가장 많았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