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도쿄 어느 미술관에서 허리를 숙인 이유

입력 2024-05-03 18:10
수정 2024-05-04 00:07
우리는 미술관에 왜 가는 걸까? 가장 느린 속도로 걷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고 책에 썼다. 예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 앞에 선 우리가 진짜 위대한 거라고도 썼다. 예술 향유는 특별한 게 아니라고, 누구나 누릴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책을 쓰고 강의하고 여기저기 외치고 다닌 효과가 조금은 있어 퍽 많은 사람이 예술 향유자가 됐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느리게 걷는 미술관, 도쿄 예술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미술관에 명화가 즐비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도쿄를 중심으로 미술관만 여섯 군데 감상했다. 첫날 방문한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는 마크 로스코의 압도적인 벽화가 전시돼 있다. 로스코의 의도대로 조도를 잔뜩 낮춘 전시실,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노라면 깊은 심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스탕달 신드롬’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림만 보고 나온 게 아니었다. 미술관에 오래 머물고 충분히 느끼며 그곳에 있는 카페에서 식사도 했다.

둘째 날 간 네즈미술관은 시공간 자체가 예술이었다.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며 한지 창으로 어울지는 그림자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미술관마다 순간의 감흥을 휘발하지 않기 위해 응시와 기록을 함께 했다. 내 마음의 그림 한 점을 발견해내고 반드시 짧은 영감을 길어 올려야 했다. 아이부터 성인까지 모두 함께 참여했다. 각자 고른 그림과 글을 보여줬을 뿐인데 삶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살아온 날들을 경청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마음이 들리고 만져졌다. 어린이부터 시니어까지 모두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미술관도 하나의 거대한 콘텐츠다. 콘텐츠를 어떻게 기획하고 가공할 것인가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일본의 미술관들은 일단 보유한 소장품 자체가 엄청났다. 이를 잘 활용해 전시하고, 새로운 기획도 흥미진진했으며, 미술관 전체를 삶의 환경으로 만들었다. 미술관을 돌며 처음엔 와! 놀라다가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이 방대한 명화들과 작품의 구성과 유지 또한 입이 떡 벌어졌다.

일본 미술관들을 둘러보다가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이런 작품들을 잔뜩 볼 수 있어 기뻤다가 자주 볼 수 있는 이들에게 샘도 났다.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 갔을 때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브 쿠르베, 라울 뒤피, 장 뒤뷔페 등 서울에서 특별 전시로 만난 작품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동행들의 감탄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비슷하게 감정 기복을 겪는 것 같았다. 너무 좋은데 너무너무 질투가 나는.

그런데 전시관마다 아주 낮게 걸린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상했다. 예술 앞에 무릎 꿇으라는 건가. 나중에 알고선 깜짝 놀랐다.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해 일부러 눈높이를 낮춰 걸어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휠체어를 탄 이가 많이 보였다. 미술관엔 휠체어와 자원봉사자가 늘 준비돼 있다고 했다. 휠체어를 느리게 밀다가 탄 분이 손을 들면 그 그림 앞에 멈추고 그 앞에 오래 머물렀다.

불현듯 예술 향유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외치기만 한 게 부끄러워졌다. 이토록 구체적인 배려 앞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예술은 향유가 아니라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도 장애인도 노인도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환경 같은 것. 일본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환경을 만들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 미술이 아니다. 삶과 죽음, 그 너머까지 더듬고 어루만지는 눈동자의 빛을 만들어주는 것이 미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