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서 주식 좀 한다는 사람들 다 샀다"…치과의사의 한탄 [노정동의 어쩌다 투자자]

입력 2024-05-05 10:00
수정 2024-05-05 12:32
#. 누군들 애증하는 '나만의 주식'이 왜 없을까요.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고, 팔았어도 기웃거리게 되는 그런 주식 말입니다. 내 인생을 망치기도, 내 인생을 살리기도 하는 그런 주식.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가 '내 인생 종목'을 만나게 됐는지 [노정동의 어쩌다 투자자]에서 '첫 만남',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들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아래 기자페이지 구독을 눌러주세요. [편집자]


"우리 때는 한국전력 주식이 지금 MZ세대의 카카오, 네이버 같은 주식이었습니다. 1990년대 강남에 있는 증권사에 가면 전문가들이 다 한전 주식을 권할 때였으니까요. 주가가 이렇게 안 오를 줄은 그들도 몰랐을 거예요."

서울 압구정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50대 한 의사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부모님이 1990년대에 처음 한전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해 그 영향을 받아 저도 관심을 갖게 됐다"며 12년째 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압구정에서 주식 좀 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당시에 한전 주식을 많이 추천했었다"며 "증권사 PB들이 영업을 위해 의사들, 선생님들, 자산가들에 많이 권하면서 2012년 처음 투자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의사는 "몇 년 지나자 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더니 3배 이상 평가이익이 나면서 '역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전이 적자에 시달리고 전기요금이 이렇게 까지 안 오를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장기 투자(장투)에 대한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한국전력만큼 '장투'에 실패 사례로 거론되는 주식도 많지 않을 겁니다. 한국전력은 1989년 상장 당시 '국민주'로 주목받으며 화려하게 증시에 입성했습니다. 공모주 청약 당시 많은 국민들이 한전의 재무적 안정성, 에너지 공기업으로서의 미래 가치를 믿고 의심 없이 큰 돈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국민들도 '자식에게 물려줄 주식'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주식'으로 생각하며 당시 6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주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한전 같은 공기업이 망할리 없다는 게 당시 국민들의 분위기였습니다.


1989년 정부는 한전 공모주(공모가 1만3000원) 청약을 진행했고, 특히 농·어촌 저소득층에는 3년간 안파는 조건으로 30% 할인된 주당 9100원에 150주까지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부도 한전이 우량 기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농어민들의 재산증식이란 '국민주' 보급 취지를 과감히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그때 함께 국민주로 평가받던 포항제철(현 POSCO홀딩스)에 장투했던 사람들과 한전을 보유했던 사람들의 성적표는 크게 갈릴 것"이라며 "포항제철은 2차전지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주가가 많이 올랐는데 한전은 배당도 못하는 기업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주가는 고점 대비 3분의 1토막인 것을 넘어서 30년 전 주가 수준과 유사합니다.

한전 주가가 오르지 않는 이유는 전기요금 인상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서 적자에 시달리고 있어서입니다. 전기요금은 매년 3·6·9·12월에 결정되는데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큰 한국으로서는 전기요금 결정에 외부 요인이 큰 영향을 받는 구조입니다.


국제유가가 하향 안정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입 물가가 높아지면, 정부 입장에서 가뜩이나 불만이 높아진 국민들에 공공요금 인상 카드를 꺼내기 쉽지 않습니다. 국내 가정용 전기요금은 지난해 3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1년째 동결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한전은 지난해 말 기준 부채가 202조원까지 불어났습니다.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못하면 생산단가가 낮아져야 하는데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이번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의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 등으로 활로가 막혔습니다. 한전은 2021~2023년에 누적된 영업손실 규모가 43조원, 이 기간 부채비율은 540%까지 늘었습니다. 2021년에는 6조원대 적자를, 2022년에는 연간 30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습니다. 급등한 연료비를 전기요금에 반영하지 못하고 원가 이하로 전기를 공급한 탓입니다.

재무구조 악화로 주주환원은 요원합니다. 한전은 2020년 마지막 배당을 한 이후 3년간 무배당을 이어왔습니다. 2020년의 경우 총 7806억원을 배당에 썼습니다. 한전은 그해 4조원가량의 영업흑자를 냈습니다.

한전에 투자한 개인투자자들은 일본의 도쿄전력과 비교를 많이 합니다. 같은 비교(Peer·피어)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추진한 증시 활성화 대책인 '밸류업 정책' 이후 도쿄전력은 주가가 2배가량 뛰었습니다. 시장수익률을 45%나 뛰어넘었습니다. 범위를 더 넓혀 최근 2년(2022년~지난달) 주가 수준을 보면 도쿄전력이 230.2% 상승한 동안 한전은 2.2% 떨어졌습니다.

도쿄전력은 일본 전역에 다수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 밸류업 정책 시행 이후 저PBR(주가순자산비율)주로 주목받으면서 주가 부양에 성공했습니다. 또 2022년 대규모 적자를 계기로 전기요금을 인상하면서 지난해 흑자전환에 성공한 것도 주가 상승의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인터넷 포털의 종목토론방에는 도쿄전력과 비교하며 한전 주가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다수입니다. "올해 실적 전망은 한전이 도쿄전력보다 나은데 주가 수준은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벌어졌다", "한전도 도쿄전력과 똑같은 자산주(株)인데 주가는 정반대", "도쿄전력은 밸류업 이후 실적이 받쳐주면서 주가가 올랐는데 한전은 밸류업 때 반짝 상승하더니 전기요금을 또 못 올리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등의 한탄이 나옵니다.

증권가에선 한전의 전기요금 인상이 빨라야 올해 4분기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주가도 전기요금 인상 등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돼야 반등한다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성종화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핵심 현안은 2021~2023년에 쌓인 막대한 누적 적자를 해소해 국가전력망 투자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적정 수준의 요금 인상인데 2분기는 이미 결정이 됐고 3분기는 전력 성수기라 요금 인상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며 "전기요금 인상 시기는 4분기가 유력해 보인다"고 내다봤습니다.

그러면서 "총선 이후 요금 인상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 밸류업 프로그램 등으로 최근 주가가 올랐다가 1분기 실적 발표일을 기점으로 다시 횡보 또는 조정 국면에 들어갔다"며 "4분기 요금 인상 유력 시기까지는 실적이 숨을 고르면서 주가 상승의 명분을 제고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11월 전기요금 인상 효과가 반영되면서 올 1분기 실적은 영업이익 흑자전환에 외형 성장세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원·달러 환율로 인해 3분기부터 비용 지표가 상승하는 구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이달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한 신한울 2호기 기여를 감안하면 연간 실적 눈높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라고 말했습니다.

한전이 예상대로 올해 10조원에 가까운 영업흑자를 낸다면 4년 만에 다시 배당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정혜정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3년간 계속된 적자로 배당을 시행하지 못했으나 지난해 전기요금 인상을 바탕으로 올해 큰 폭의 흑자전환을 달성하면 배당 재개를 기대할 수 있다"고 관측했습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