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무비에 열광하는 이탈리아 작은 도시…정우성이 화답했다

입력 2024-05-02 19:13
수정 2024-05-09 17:00


지난 4월 24일 이탈리아 북동부 알프스 기슭에 있는 도시 우디네. 제26회 우디네극동영화제의 화려한 개막식이 있었다. 인구 9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우디네극동영화제는 국내 관객에겐 다소 낯설지만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영화제 초창기부터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을 꾸준히 초청하고 한국 영화를 유럽 관객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해왔다. 사브리나 바라체티 위원장은 매년 부산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 국제영화제 등 국내 행사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한국 영화인들과 네트워크를 끈끈히 쌓아온 인물. 올해는 한·중·일을 포함한 12곳의 아시아 국가에서 출품된 장편영화 79편이 2일까지 9일간 상영됐다. 알프스산맥과 아드리아해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4월 말의 우디네를 뜨겁게 달군 한국 영화와 영화인을 소개한다.

한국 영화 섹션은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다. 영화제는 한국 고전영화와 개막이 있는 4월을 기준으로 그 전년도부터 그해 3월까지 나온 한국 상업영화, 독립영화 그리고 미개봉 작품들을 상영한다. 올해는 ‘비공식작전’ ‘파묘’ ‘서울의 봄’ ‘시민덕희’ ‘밀수’를 포함한 상업 장편영화들과 ‘미망’ ‘301호 모텔 살인사건’ 등 독립영화가 진출했다. 아직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은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까지 프리미어로 상영되며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단일 국가로 가장 많은 편수인 총 18편으로 관객을 만났다.

파묘·비공식작전…한국형 블록버스터 총출동 스케일을 고려했을 때 우디네극동영화제는 분명 작은 영화제다. 하지만 분명 내실 있는 프로그램과 게스트 리스트로 빠르게 성장하는 영화제이기도 하다. 한국 관점에서는 가장 충실하고 꾸준히 한국 영화와 영화인을 소개하고 있는 고마운 영화제다. 특히 영화제는 한국 영화제들에서도 보기 드문, 과감한 프로그램과 토크 이벤트를 열어 해외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낸다.

작년엔 장선우 감독 회고전을 통해 컬트 영화이자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이슈를 일으킨 문제작 ‘거짓말’ 무삭제판을 공개했다. 상영 후에는 장 감독과 신철 제작자를 초대해 당시 한국 영화산업과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관객들과 긴 토론을 나누며 한국 영화사의 한 시기를 공유했다.

올해 우디네극동영화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한국 블록버스터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과 이 작품들의 감독이 대거 게스트로 참여해 이탈리아 관객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최동훈(외계인) 김성훈(비공식작전) 김성수(서울의 봄) 허진호(보통의 가족) 박영주(시민덕희) 장재현(파묘) 감독 등 상영되는 작품의 거의 모든 감독이 영화제에서 열리는 토크 프로그램과 Q&A에 참여했다. 지난달 24일 열린 개막식에는 감독들과 정우성 배우가 참여해 현지 관객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해외에서의 한국 영화의 위상과 관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1950년대 한국 고전영화 세계 최초 공개올해 우디네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 있는 행사도 열렸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최은희가 주연한 ‘지옥화’(1958)를 포함해 1950년대에 개봉한 한국 고전영화 7편의 디지털 복원판이 우디네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50/50 한국 고전영화 패키지’라고 명명된 이 프로그램은 영상자료원이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국 고전영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복원한 1950년대 한국 영화들로 구성한 상영 프로그램으로, 외국인 관객을 위한 영어 자막이 추가됐다.

영상자료원과의 컬래버레이션 상영작은 또 6·25전쟁 중 제작한 영화로 유일하게 전체 분량이 현존하는 전창근 감독의 ‘낙동강’(1952), 반공 휴머니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 등이 포함됐다.시대를 초월한 욕망, 한국판 멜로의 원조…이탈리아도 통했다
이명세 감독 '지독한 사랑' 회고전
올해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는 이명세 감독 회고전이 열려 현지 관객과 평론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상영된 작품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지독한 사랑’(사진). 1996년 개봉한 ‘지독한 사랑’은 개봉 당시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몬트리올국제영화제를 포함한 해외 영화제에 다수 초청됐다. 올해 영화제를 위해 디지털 리마스터링돼 영화의 모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청명함이 더해졌다.

영화는 대학교수이자 유부남인 영민(김갑수 분)과 그와 사랑에 빠진 싱글 여성 영희(강수연 분)를 중심으로 한다.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늘 헤어질 시간을 준비하는 역설의 굴레가 계속되다 눈 덮인 강원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영화는 끝난다.

‘지독한 사랑’은 1990년대에 등장한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이명세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90년대 한국 영화의 빈번한 소재가 된 이른바 ‘불륜’ 커플을 중심 캐릭터로 두고 있지만 사랑의 본질, 저항 불가한 에너지와 욕망 자체에 초점을 둔다.

무엇보다 영화는 감독 이명세의 시그니처인 아이코닉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유리창의 반사체로 보여지는 바닷가 풍경, 백숙을 뜯어 먹는 남녀의 초상, 나체로 서로에게 기대앉아 신문을 같이 읽는 모습 등 당시 한국 영화에서 ‘멜로’를 구현하는 시각적인 표현 방식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이미지로 사랑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영화는 30여 년 전 개봉 당시 해외 영화제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올해 우디네에서 역시 큰 호응을 얻었다. 상영 후에도 관객들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마스터 클래스에선 시각 이미지에 관한 관객의 질문이 이어졌고, 이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비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인 자크 타티를 언급했다. 타티의 영화들이 그렇듯 이번 우디네에서 재상영된 ‘지독한 사랑’은 이미지의 힘, 고전의 무한한 생명력과 가치를 증명했다.

우디네=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