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엔저의 시름

입력 2024-05-01 17:59
수정 2024-05-02 00:14
“엔화 가치는 현재 최저치에 도달했고 조만간 반전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엔화에 투자하는 것은 훌륭한 의사결정이라고 본다.” 지난해 11월 한국을 찾은 ‘미스터 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차관이 한 말이다. 그는 당시 1달러에 150엔까지 내려간 엔화 가치가 2024년 중반께는 달러당 130엔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의 전망을 비웃듯 엔화는 지난달 29일 34년 만에 달러당 160엔을 찍는 등 기록적인 약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 방어를 위해 5조엔(약 44조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일 154엔까지 급락한 엔·달러 환율은 다시 157엔대로 올라 160엔을 재돌파할 기세다. 일부에선 160엔이 뚫리면 165엔, 170엔까지도 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슈퍼 엔저’를 부른 달러 강세가 꺾일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하와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 기대가 낮아진 것도 엔화 약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엔화 가치 반등’에 베팅한 국내 투자자들은 속이 타들어 간다. 엔화 예금 규모는 지난 3월 말 현재 98억달러로 불어난 상태다. 구입 단가 대비 10% 떨어졌다고 가정하면 무려 1조4000억원 가까운 평가손실이 난 것이다. 이들은 100엔당 1000원 선을 마지노선으로 여겨 그 이하에서 공격적 베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 환율은 100엔당 880원 근처로 무너져내렸다. 이른바 ‘물타기’로 베팅 규모를 키운 사람들은 더 큰 손실 위험에 노출돼 있다. 전문가적 식견을 자랑하며 엔화 표시 미국채상장지수펀드(ETF)를 사들인 ‘일학개미’들도 미국 국채금리 상승과 엔저에 두 번 울고 있다. “환율은 신도 모른다”는 말이 실감 나는 분위기다. 비정상적으로 떨어진 통화 가치는 언젠가 다시 올라오게 마련이지만, 과연 엔화 하락이 ‘비정상적’ 요인에 의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불연속적이고 단절적 변화가 많은 금융시장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주가든 환율이든 과거의 기억이나 감각에 의존하는 투자는 금물이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