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경제에 이례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기대 이상의 호황을 지속하면서 물가가 안정적 수준으로 낮아지지 않자,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 인하 방침을 재고하고 나선 게 발단이 됐습니다. 고금리 상황이 종료되면 세계경제에 훈풍이 불 것이란 기대감은 쑥 들어가 버리고, 미국 달러화 가치는 초강세를 나타내 세계경제에 큰 부담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습니다. 지난 16일 1400원대를 찍고 1380원에서 오르내리며 고환율이 고착화하는 게 아닌가 불안감을 줍니다.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면 원유 등 수입품 가격이 올라 국내 물가가 상승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로 국제유가까지 뜀박질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나홀로 호황’을 만끽하는데, 세계경제는 고환율·고유가·고금리의 3고(高) 파고에 휘청거리는 모습입니다.
세계 각국에 가장 큰 위협은 급격한 환율상승(통화가치 하락)입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한국과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이 지난 17일 미국 워싱턴에서 만나 최근 원화와 엔화 가치의 하락을 우려한다는 입장을 사상 처음으로 내놓았을 정도입니다. 세계경제에 왜 이런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는지, 세계경제가 다시 환율 전쟁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미국 '나홀로 질주' 탄탄한 경제체력 덕분
금리인상 '약발' 안 먹혀 세계 경제는 꼬였죠
미국 경제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2020년 역성장(-2.2%)했을 뿐, 이후 3년간 연평균 3.4%씩 성장했습니다. 같은 기간 2.8%씩 성장한 한국보다 뛰어난 성적이죠. 최근엔 이런 분위기가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올 들어 미국의 생산·소비·고용·투자 등 경제지표는 모두 예상치를 크게 웃돌고 있어요.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미국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2.7%로 높였습니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20개국)은 0.9%에서 0.8%로 전망치를 낮췄고, 한국(2.3%)과 일본(0.9%)은 그대로 유지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금리인상, 달러 강세만 불러
미국 경제의 ‘나홀로 질주’는 기본적으로 경제의 기초체력(fundamental)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선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기업의 혁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통한 제조 기업 유치로 기업 투자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민 노동자 유입도 늘려 기업의 인력 수요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노동생산성 또한 원격 근무 확산에도 불구하고 계속 높아지고 있어요.
이렇다 보니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서로 반비례한다는 ‘필립스 곡선’의 상식이 지금 미국에선 통하지 않습니다. 물가상승률은 2022년 9.1%까지 높아졌다가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상 처방으로 작년 말 이후 3%대로 낮아졌습니다. 반면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인 3%대 후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 경제 상황을 흔히 ‘골디락스(Goldilocks)’라고 하는데요, 미국 경제는 이보다 더 좋은 ‘황금 경로(Golden Path)’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마저 나옵니다.
경제 펀더멘털이 탄탄하면 물가는 오를 수밖에 없고, 물가 수준을 반영하는 명목금리도 함께 오릅니다. 돈의 가격인 금리가 오르면 그 나라 통화를 사려는 수요가 몰리고 통화가치는 올라갑니다. 반대로 움직이는 환율은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 Fed는 물가상승률을 2%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기준금리를 높여왔습니다. 2년도 안 돼 제로(0) 금리를 연 5.25~5.50%까지 급격히 인상했죠. 문제는 이런 금융정책이 물가는 잡지 못하고 고금리 상황만 오래 지속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달러 초강세, 세계 각국 통화의 약세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1973년=100 기준)는 최근 106까지 올라왔죠.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 72~73까지 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크게 상승한 겁니다.
경제 체질 강화로 고금리 당연시
금리를 아무리 올려도 시장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면 금리 경로를 활용하는 금융정책이 고장난 것이나 다름없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전문가들은 가장 큰 원인으로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비회복을 위한 지원금을 1조 달러 가까이 풀었던 것을 꼽습니다. 금리를 올려도 미국 가계는 부담 없이 소비를 즐겼고, 물가를 잡기 어려웠던 겁니다. 또 미국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금리가 대부분 고정금리여서 과거 금리가 낮을 때 대출받아 집을 산 미국인들이 고금리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미국의 경제 체력 강화로 중립금리(물가 상승이나 하락 없이 잠재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는 이론적 금리 수준)도 함께 올라갔다는 설명입니다. 중립금리는 기준금리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입니다. 미국 Fed가 생각하는 중립금리는 연 2~3%인데, 실제로는 이보다 높은 4% 이상으로 이미 올라섰다는 겁니다. 연 5.50%에 달하는 Fed의 기준금리가 결코 높지 않은 수준이라고 시장에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경제 시스템이 질적으로 변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막대한 설비투자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뀌면서 자본투자의 중요성이 덜해졌다는 겁니다. 이러면 금리정책이 기업 투자에 영향을 덜 미치게 됩니다. 또 핀테크(기술과 결합한 금융) 등을 이용한 금융서비스 혁신이 일면서 은행 부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해졌고, 은행을 통한 금리 파급효과가 덜해졌다는 설명입니다.NIE 포인트1. 중립금리의 개념, 달러인덱스의 변동 상황을 확인해보자.
2. 기준금리를 조절하는 금융정책 외에 어떤 금융정책이 있는지 공부해보자.
3. 미국과 한국의 기준금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찾아보자.강달러는 수출경쟁력 낮춰 美무역수지 악화
'제2 플라자합의'설에 환율전쟁 재점화 촉각
세계경제는 안정적인 교역과 결제시스템 속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한 나라 경제만 잘나가면 반대 측에서 경제가 어려워지는 나라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경제 체력이 약한 나라에서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일어날 수 있고, 이게 세계경제 전체로 번지며 금융위기를 부를 수 있습니다. 미국 경제의 ‘나홀로 호황’이나 달러 초강세가 미국에도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최근의 한·미·일 재무장관 회담과 외환시장 ‘구두 개입’은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사전 점검하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여전한 미국의 ‘쌍둥이적자’
그런데 조금 더 미국의 속마음으로 들어가 볼까요? 19세기 말 이후 근현대 경제사를 보면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머쥐는 과정에서 겉으론 ‘강(强)달러’를 표방했습니다. 달러 가치가 금(金)에 맞먹을 정도가 돼야 달러 중심의 세계 교역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미국은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 수행, 자유주의 철학에 기반한 공화당의 감세정책 등으로 미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재정적자에 취약했습니다. 또 독일부터 일본, 중국까지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들 나라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무역적자를 내온 게 미국입니다. 이른바 만성적인 ‘쌍둥이적자’는 미국 경제의 뇌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작년 회계연도에 국내총생산(GDP)의 6.3%에 달하는 1조6950억 달러(약 2330조원)의 재정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작년 경상수지 적자는 8188억 달러(약 1128조원, GDP의 3.0%)에 이르렀어요. 재정적자나 경상적자가 GDP의 3%를 넘으면 위험한 수준입니다.
최근의 달러 초강세는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현저히 떨어트리기 때문이죠. 달러 강세가 지속되면 미국 국채에 대한 해외 수요가 늘어나고, 미국 정부는 국채 발행의 유혹을 더 느끼게 됩니다. 나랏빚이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의 한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대선에서 재집권하면 수출을 늘리기 위해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제2플라자 합의’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평가된 달러화가 미국 무역적자의 원인이란 시각을 트럼프 2기 행정부를 구성할 일부 인사가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인위적 환율 개입이 항상 문제
그렇다면 미국은 ‘강달러’가 아닌 ‘약(弱)달러’를 원하는 걸까요? 경제사가들은 19세기 말부터 이뤄진 환율전쟁의 상당 부분이 달러 평가절하를 이루기 위한 미국의 시도에서 비롯했다고 봅니다. 때에 따라선 수입물가를 낮추기 위해 강달러(달러 평가절상)를 추구하는 ‘역환율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죠.
흔히 말하는 ‘1차 환율전쟁’은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다며 1933년 금본위제에서 탈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금 가격을 1온스당 20.1달러에서 35달러로 급격하게 인상시켜 결국 달러 가치를 69% 절하시켰습니다. 이로써 영국에 빼앗긴 수출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후 브레튼우즈체제를 붕괴시킨 것도 미국이 촉발한 ‘2차 환율전쟁’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베트남전쟁으로 재정적자가 심화한 미국은 1971년 금환본위제마저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달러 가치를 떨어트렸습니다.
지금 화제가 된 ‘플라자합의’는 일본 경제의 급부상으로 1980년대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심대해지자 벌어진 일입니다. 1985년 미국 재무장관이 뉴욕 맨해튼플라자호텔로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 등을 불러 각국 통화의 강세를 유도해달라고 강력하제 요청합니다. 반강제적으로 다른 나라 통화가치를 높인(절상) 사례인데요, 이후 10년 뒤 미 달러화 가치는 엔화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우격다짐이 세계 경제에 큰 문제를 불러온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정부는 엔고(高)에 따른 경기침체를 우려해 금리를 낮췄고, 이게 막대한 유동성을 늘려 거품경제를 불러오는 단초를 만들게 됩니다. 이런 환율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세계경제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을 텐데요, 그런 사태가 되풀이돼선 안 되겠죠?NIE 포인트1. 미국의 쌍둥이적자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공부해보자.
2. 금본위제부터 달러본위제까지 국제통화 결제 시스템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알아보자.
3. 힘으로 환율을 변동시켜온 미국이 중국 등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정당한 일인가?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