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원조 대세’ 박민지(26)에게 골프는 시험과도 같았다. 그에게 골프는 무조건 우승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골프가 재밌냐는 질문이 제일 싫었어요. 솔직히 재미가 없었거든요. 잔디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갔어요.” 투어 통산 18승을 자랑하는 그는 지난해 ‘골프가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박민지가 올해 100% 다른 사람이 돼 돌아왔다. 건강 악화로 골프를 잠시 떠나고 나서야 골프를 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3차 신경계 통증’ 재발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박민지는 25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파72)에서 열린 시즌 첫 번째 메이저대회인 크리스에프엔씨 제46회 KLPGA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친 뒤 “골프가 다시 좋아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날 버디 5개와 보기 1개를 묶어 4언더파 68타를 쳐 공동 9위에 이름을 올렸다. 6언더파 공동 선두인 박주영(34), 전예성(23)과는 2타 차다.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질주 중단
박민지는 KLPGA투어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2017년 KLPGA투어에 데뷔한 그는 그해 삼천리 투게더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매년 1승씩 올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21년과 2022년은 ‘박민지 천하’였다. 2년 연속 6승씩 거두며 연속 상금왕을 차지한 박민지는 지난해에도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우승을 포함해 상반기에만 2승을 수확하며 통산 18승을 쌓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강 악화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하반기 내내 3차 신경통을 겪은 박민지는 10월 중순부터 3주간 투어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3차 신경통은 얼굴 구강 치아 부분에 감각을 전달하는 3차 신경에서 발작적으로 전기가 쏘는 듯한 통증이나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박민지는 “이마부터 오른쪽 머리 위쪽까지 강한 통증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박민지는 매년 미국에서 두 달가량 진행한 전지훈련도 포기했다. 대신 국내에 머물며 체력훈련에 집중했다. 지난달 시즌 개막전인 하나금융그룹 싱가포르 여자오픈과 태국에서 열린 블루캐니언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각각 공동 12위와 공동 4위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리는 듯했지만, 통증이 지속되면서 다시 3주간 휴식기에 들어가야 했다. 박민지에게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복귀 첫날부터 우승 경쟁
건강을 되찾은 뒤 돌아온 박민지는 이날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2주 전부터 통증이 아예 없어서 이번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박민지는 대회 첫날부터 발군의 퍼트감을 앞세워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4번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 앞쪽 페널티 구역에 빠지는 바람에 이날 유일한 보기를 적어냈으나 이후에는 거침없었다. 7번홀(파5) 버디로 바운스백에 성공한 박민지는 후반 10번홀(파4)과 11번홀(파5)에선 6m가 넘는 버디 퍼트를 연달아 떨어뜨렸다. 15번홀(파5) 버디에 이어 16번홀(파4)에서도 7m가 넘는 버디 퍼트를 성공시킨 뒤에는 갤러리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온 박민지는 “오랜만에 대회에 나와 이렇게 좋은 성적으로 1라운드를 마쳐 과분한 느낌”이라며 “아프고 나서야 골프장에 있다는 자체가 건강한 것이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이거 우즈(미국)가 교통사고 이후로도 계속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다”며 “우즈도 저렇게 하는데, 저도 죽더라도 골프장에서 죽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복귀전 첫날부터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박민지는 지난해 6월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우승 이후 10개월 만에 통산 19승째에 도전할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제가 메이저대회 중 이 대회(KLPGA 챔피언십)와 한화 클래식에서만 우승을 못 했다”며 “이번에 우승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양주=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